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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다한 지식에 매몰되면 진정한 제왕의 도는 멀어져”

없는 길을 홀로 헤쳐나가야 한다면 얼마나 막막하겠는가. 다행히 가이드가 곁에 있다. 자동차에 수리공이 있고 목공은 나무의 재질에 익숙하듯이 ‘인간’에게도 전문가가 있다. 스스로 자신을 잘 안다고? 그것은 착각이거나 오만이다. 다른 모든 지식처럼 인간에 관한 지식 또한 훈련과 통찰력의 산물이다. 성현(聖賢)들이 미리 발견한 전문적 노하우를 경전(經傳)이라 부른다.

1. ‘사서삼경(四書三經)’은 그러나 일관된 체계를 갖고 있지 않다. 그것들은 상황과 대상에 따라 달리 발화(發話)된 것들이다. 이들을 관통하는 일관된 중심 혹은 원리가 있을까. 있다. 『대학(大學)』이 그것이다. 인간이 이 땅에서 감당해야 할 의미와 책임의 대강(大綱)을 담고 있다. 그래서 사서(四書) 가운데 가장 먼저 읽어야 할 책으로 꼽혔다. “사람의 길은 자신의 존재(明德)를 밝히고, 남을 새롭게 하며(新民), 존재의 최상 최적의 상태에 도달하는 데 있다(至於至善).” 그를 위한 여덟 개의 조목이 따른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는 익히 들어본 말일 것이다.

선각(先覺)들의 천언만어(千言萬語)가 이 세 강령(綱領)과 여덟 항목(條目)의 프레임 안에 들어 있다. 체계를 갖춘 편집의 유혹이 없을 수 없다. 주자의 뛰어난 제자인 서산(西山) 진덕수(眞德秀·1178~1235)가 이 작업에 손을 댔다. 『대학』의 체제에 따라 경전을 다시 분류하고, 고금의 사적들을 보태 『대학의 부연된 의미(大學衍義)』라는 책을 완성했다. 율곡은 이 책이 “학문의 기초(爲學之本)와 정치화의 순서(爲治之序)를 겸전한” 것으로 가히 “제왕이 도를 구현할 나침반(帝王入道之指南)”이라고 높이 쳤다.

저자인 진덕수는 중요한 인물이다. 이 ‘정치의 책’ 외에 ‘마음의 수련’을 위한 실질적 지침을 가려 뽑아 『심경(心經)』을 만들기도 했다. 『심경』은 퇴계의 평생 반려였고, 『대학연의』는 율곡의 『성학집요』의 표본이었으니, 조선 유학의 토대에 그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퇴계·율곡만이 아니다. 일찍이 조선 건국의 주인공 삼봉 정도전은 새로운 유교적 정치제도를 구상하면서 고려를 지배하고 있던 불교의 맹점과 폐단을 신랄하게 파고든 바 있다. 그 결과가 『붓다씨를 여러 측면에서 비판함(佛氏雜辨)』이라는 책이다. 그의 논점은 신랄하고, 경험적 관찰에서 오는 설득력을 갖고 있는데, 거기 동원된 자원은 송대 유학, 특히 진덕수의 『대학연의』에 크게 빚지고 있다. 이 책은 고려 말에는 혁명의 서였고, 조선 초기 제왕학의 기본 교재이기도 했다.

2. 그럼에도 『대학연의』는 충분하지 않다. 분량이 너무 많고, 글이 산만한 탓이다. 율곡은 이 책이 “사건(紀事)의 기록에 치중하여 아쉽게도 실학(實學)의 체통을 놓쳤다”고 썼다. 여기 실학은 주의를 요한다. 우리가 조선 후기의 개혁적 사고에 붙이는 그 역사기술의 개념과 혼동하면 큰일난다. 율곡이 말하는 실학은 ‘인간성의 구현을 위한 훈련으로서의 학문’을 가리킨다. 이것이 본시 주자학이 정의한 실학(實學)이다. ‘실학’의 저작권은 아이로니컬하게도 주자학에 있음을 기억하자. ‘실(實)’이라는 이름에는 불교의 허(虛), 즉 현세 부정과 개인적 구원의 추구와는 달리, 존재하는 세계를 긍정하고 사회적 책임의 프로그램을 론칭한다는 주자학의 자부심이 담겨 있다.

지금은 그러나 누구도 이 뜻을 떠올리지 않는다. ‘실학’의 옛 의미는 잊혀지고, 그 집에 ‘실용’과 ‘근대’가 새 주인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3. 그런데 율곡은 왜 『대학연의』를 ‘실학’의 체통이 아니라고 했을까. 그의 설명은 이렇다. “학문의 폭은 당연히 넓어야지, 좁고 편향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그 전에 비전과 지향부터 갖추어야 한다. 이 토대가 없을 때 지식은 현실과 유리되고 마음의 중심 또한 흔들리게 된다. 취사(取捨)가 불분명한 상태에서 독서는 방향을 잃고 표류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먼저 요점을 뚫고 얼개를 장악하라(先尋要路, 的開門庭)! 그런 다음에야 박학을 자유롭게 할 수 있고, 사물들의 대면이 지식의 증장으로 이어질 수 있다(博學無方, 觸類而長).”

역시 학문의 토대는, 율곡이 늘 말하는 바 ‘입지(立志)’, 뜻을 세우는 데 있다. 그리고 바른 요령을 얻는 데 있다. 더구나 군주는 만기총람(萬機總攬), 모든 일의 최종적 결정과 책임이 모여 있는 자리다. 결재하고 회의할 시간에 쫓기느라 독서하고 사색할 시간은 적다. 그래서 더욱 “핵심(綱維)을 공략하고 목표(宗旨)를 뚜렷이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잡다한 지식에 매몰되어, 경전을 외우는 기송(記誦)에 묶이거나, 문장의 기교인 사조(詞藻)에 치우치거나 하여 진정한 제왕의 도를 소홀히 하거나 저버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제왕의 ‘실학’을 위해 율곡은 『성학집요』를 편찬했다. 체제는 역시 『대학』을 따랐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항목에 따라 사서삼경에 담긴 성현의 말씀과 송대 학자들의 금언들을 분류해 채워 넣었다. “절목은 빠진 것이 없이 할 것. 언사는 간략하되, 메시지가 무궁한 것(辭約理盡)을 고를 것”을 모토로 했다.

여기 부족하거나 논란이 되는 부분은 ‘자신의 의견’을 과감하게 붙여 놓았다. 퇴계가 보았다면 기겁을 했을 것이다. 나로서는 이 부분이 특히 빛난다고 생각한다. 역시 『성학집요』는 율곡의 작품이다. 그는 선조에게 당부한다. “내 재주가 좀 부족하더라도, 가려 뽑은 것은 성현의 말씀이니, 살펴주소서. 신이 가진 혼신의 정력을 여기 다하였나이다.”
이때가 1575년 선조 8년, 율곡의 나이 마흔, 지금 기준으로는 아직 젊을 때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고전한학과 철학을 가르치고 있으며『주희에서 정약용으로』『조선유학의 거장들』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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