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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볼모 시절 서구 문명 접했지만

드라마 ‘추노’에서 소현세자 역을 맡은 강성민. 사진 KBS 제공
“오. 그러니까 이것이 당신들이 숭배하는 신의 상인가요?”
“그렇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상이지요.”
“흐음···! 참으로 기묘하군요. 죄송하지만 제게는 벌거벗은 남자가 매달려 있는 형상으로 보이는데···. 많이 괴로워 보이고, 불쌍해 보이기는 해도. ···이게 지엄하신 신이라니?”

“세상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모습입니다. 우리는 모두 날 때부터 죄인이지요. 그러나 우리 주께서 대신 돌아가심으로써 죄 사함을 받았답니다.”
“···잘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우리 모두 날 때부터 죄인이라니···. 사람은 부모님의 순수한 정기를 받아 세상에 태어나는 게 아닐까요? ···아무튼 죄를 대신 지고 간다는 말씀은 왠지 와 닿습니다. ···어쩌면 제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니까.”

이렇게 말하며, 비단 옷에 값진 모피 외투를 걸쳤지만 얼굴빛이 파리한 동양의 젊은이는 슬픈 눈길로 십자가상을 바라보았다. 푸른 눈에 붉은 수염의 늙은 서양인은 말없이 그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다. 이 이야기는 ‘한국사를 움직인 만남’들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1644년 9월, 청나라에 점령된 북경에서 있었다는 소현세자와 서양 선교사 아담 샬(중국명 탕약망)의 만남은 ‘한국사를 크게 움직일 뻔했던 만남’으로 곧잘 거론된다.

병자호란 후 청나라에 끌려가 볼모살이를 한 지 7년이 넘고 있던 소현세자는 청나라 황실이 북경을 새로운 수도로 삼고 입성하는 길에 동행해 이때 북경에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명나라 때부터 북경에 머물며 천문역법·화포 제조 등의 기술을 미끼로 선교 활동을 해온 아담 샬과 만났던 것이다.

소현세자는 아담 샬과 처음 만나 매우 좋은 인상을 받았던 것 같다. 이번에는 자신의 숙소로 그를 초대했으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서양의 역법을 배우기 위해 역관들을 데려와 아담 샬에게 교육을 받도록 하며 자신도 옆에서 이것저것 물어 보고, 만져 보고 했다. 그처럼 친밀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였기에, 두 사람이 만난 지 한 달여 만에 세자가 청나라의 허락을 받고 귀국하게 되어 헤어질 때는 서로 손을 잡고 아쉬움의 눈물을 흘릴 정도였다고 한다.

아담 샬은 귀국하는 세자에게 서양 역법서뿐 아니라 천구의, 그리고 성상과 성서도 선물했다. 이에 소현세자가 보낸 감사의 편지가 아담 샬의 『회고록』에 실려 있는데, 소현세자는 성상이 “보기만 해도 마음이 가라앉고 깨끗해지는 것 같다”고, 성서는 “마음을 닦고 덕을 기르는 데 적합하다”고 밝혔다. 이를 미루어 소현세자는 당시 조선 최초로 천주교에 귀의했으며, 따라서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는 이승훈이 세례를 받았던 1784년이 아니라 1644년으로 봐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같은 편지에서 소현세자는 “역법서는 조선에 가져가 복사하고 인쇄해서 널리 알리겠다···우리 선비들은 새로운 학문에 기뻐하며 열심히 연구할 것”이라고도 언급했다. 이 언급 때문에 이 만남이 단순한 ‘낯선 곳에서의 낯선 만남’, 즉 만주족이 점령한 한족의 수도에서 독일인 신부와 한국인 왕자의 짧은 만남이 아니라, 한국사의 물줄기를 크게 바꾸어 놓을 뻔했던 만남이라는 현대 역사학자들의 주장이 비롯되었다.

청나라에 병자호란을 겪고 볼모로 끌려갔던 경험을 치욕으로만 여기고 북벌을 준비했던 봉림대군, 즉 뒤의 효종과는 달리 소현세자는 청나라의 문물에 호의적이었으며,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부국강병의 밑거름으로 삼아야 한다는 의식이 확실히 있었다. 여기에 아담 샬과의 만남을 계기로 서양의 과학기술까지 직접 받아들이려는 자세를 가진 게 아닐까? 그렇다면 만약 그가 청나라에서 돌아온 지 두 달 만에 숨지지 않고(살해되었다는 설이 끊이지 않는데), 인조를 계승해 왕이 되었다면 우리나라는 일본보다도 훨씬 빨리 서양 문물에 눈뜨지 않았을까? 그리하여 적어도 18세기 말의 실학이 17세기에 이미 꽃피고, 한국은 주체적으로 근대화의 길에 들어섬으로써 후진국으로 전락하고 국권마저 빼앗기는 설움을 안 겪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렇게 본다면 이 만남이야말로 어마어마한 가능성을 가졌던, 하지만 그만큼 아쉬움을 남기고 만 한국사의 만남이었다고 하리라. 하지만 지나치게 일방적인 추론은 곤란하다. 8년 만에 귀국한 소현세자는 분명 인조를 비롯한 국내의 지인들로부터 냉대를 받았고, 그것은 세자가 ‘원수 오랑캐’의 문물에 혹했다는 점 때문이었다. 만약 일부의 추정대로 그가 정말 살해된 것이라면, 그 동기에는 분명 그런 점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오랑캐에게 혼을 팔아먹은 인간을 보위에 앉힐 수는 없다!”

그런 분위기에서 설령 그가 무사히 왕이 되었다고 해도 적극적으로 서구 문물 수입을 추진할 수 있었을까? 더구나 천주교는 당시만 해도 교황권과 제사 문제에 대해 완강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다. 백여 년 뒤 북경에서 세례를 받은 이승훈은 “신앙의 문제에 관한 한 조선 국왕의 명령보다 교황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맹세를 해야 했다. 또한 제사는 우상 숭배이며 천주교인은 어떤 이유에서도 제사를 지내면 안 된다는 방침이 명확히 제시되어 있었다.

그런데 당시 조선의 모든 사상과 이념의 핵심이 바로 충과 효 아닌가? 임금을 거역할 수도 있으며, 부모의 제사를 지내기를 거부하는 종교라면 결단코 용납될 수 없었다. 그래서 실제 역사에서 천주교가 그토록 탄압 받았고, 정약용이나 이가환 같은 실학자들도 목숨의 위협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소현세자가 왕이 되어 천주교와 서양 과학기술을 수용하려는 정책을 폈다면, 그것이 ‘시대를 앞선 주체적 근대화’를 가져오기보다는 ‘또 한 번의 인조 반정’을 가져왔을 가능성이 더 크다.

과연 소현세자가 아담 샬을 만나고 천주교로 개종했느냐, 그리고 열성적으로 서구 문물을 수입하려 했느냐도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다. 두 사람의 만남의 기록은 모두 아담 샬의 회고록에만 의존한다. 그가 수십 년 전의 일을 회상하며 사실을 일부 왜곡하거나 미화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래도 아쉬움은 남는다. 아담 샬은 단지 중국 황실의 장식품 같은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1664년까지 청나라 조정에서 높은 지위를 누리며(왕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고도 한다) 황제와 정부 정책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와 친분을 쌓은 소현세자가 왕이 되었다면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튼튼한 파이프라인이 놓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라인을 통해 서구 문물이 조심스럽게나마 계속 유입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 결과 세상이 개벽할 정도의 큰 변화는 없었더라도 적어도 19세기까지 ‘은둔의 왕국’으로 남은 실제 역사보다는 한결 개방적인 한국사를 가질 수 있지 않았을까.



성균관대 정치학 박사로 현재 성균관대 부설 국가경영전략연구소 연구원으로 있다. 『정약용 정치사상의 재조명』『왕의 투쟁』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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