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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Knowledge <133> 출판사 브랜드에 담긴 뜻

공산품과는 달리 책을 선택하는 데 ‘메이커’의 비중은 그리 크지 않다. 출판사 이름이 독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책 내용, 저자, 편집 다음쯤 될까. 하지만 업종의 특성상 톡톡 튀거나 출판사 색깔을 분명히 드러내는 이름들을 만날 수 있다. 또 이름만으로 믿음이 가는 출판사도 여럿 있다. 출판인들의 고심, 시대 흐름이 반영된 출판 브랜드에 숨겨진 이야기를 살펴봤다. 우리 시대 지성사의 한 단면 같기도 하다.

김성희 기자, 일러스트=박용석 기자

“중국집이죠” 전화 받는 비룡소, 창업자 고향의 연못 이름이라네요

일러스트=박용석 기자
‘학이시습’에서 ‘쌤앤파커스’까지, 그리고 ‘토트’에서 ‘부글북스’까지 출판사 이름은 동서고금을 품고 있다.

이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출판 명가로 자리 잡은 민음 출판그룹이다. 종가인 민음사가 세워진 것은 1966년. 창업자인 박맹호(76) 회장이 직접 지은 이름은 ‘민음사(民音社)’였다. 백성의 올곧은 소리를 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당시엔 근엄한 한자어 이름짓기가 대세였다.

문학과 인문학 서적 중심으로 독자들의 신뢰를 확보하던 민음사는 1994년 아동서 전문 브랜드를 만든다. 박 회장 장녀인 박상희(48)씨가 대표를 맡은 ‘비룡소(飛龍沼)’였다. 한자어인 것은 같지만 엄숙성을 떨쳐내는 바람에 무협소설 전문 출판사로 오해받기도 했고 중국집으로 알고 전화가 오기도 했다는 브랜드다. 이를 만든 것도 박 회장이었다. 고향인 충북 보은군 보은읍 장신리에 있는 마을 이름으로, 과거 용들이 하늘로 오르기 전에 몸을 담갔다는 연못 이름을 딴 땄다고 한다.

하지만 민음 그룹도 세상의 변화를 따라야 했다. 과학도서 전문인 ‘사이언스 북스’ 등 영어식 브랜드가 등장한 것이다. 박상희 대표가 2008년 만든 청소년 도서 브랜드인 ‘까멜레옹’은 카멜레온의 프랑스식 발음인데 그 다양한 모습처럼 다채로운 책을 청소년들에게 선사하겠다는 뜻으로 본인이 직접 지었다. 앞서 예술·그래픽 노블 등의 책을 내는 ‘세미콜론(;)’은 박 회장의 막내아들 박상준 대표가 이미지 시대를 상징해 붙인 이름이었다.

이처럼 브랜드들은 시대의 흐름을 반영한다. 1980년 이전 고색창연한 한자어 세대, 80년대 사회과학 서적을 집중적으로 내던 뜻깊은 한글 이름 세대, 그리고 2000년 이후 외래어 세대까지가 그것이다.

1980년 이전
빵집·한약방으로 오해 받는 ‘열화당’


창업자들이 한자 세례를 받았던 만큼 출판사 이름으로 의미심장한 한자어가 단골로 등장한 세대다. 45년 창립된 ‘을유문화사’는 간지(干支)에서 왔고 역시 같은 해 선보인 ‘현암사’는 창립자인 고(故) 조상원 옹의 호를 딴 것이다. 이 중 예술서를 주로 낸 ‘열화당(悅話堂)’은 71년 창립자인 이기웅(70) 대표가 강릉의 명가인 고향집 선교장의 별당 이름을 딴 것이다. 그 이름은 중국 시인 도연명의 ‘귀거래사’ 중 “친척들의 이야기를 즐겨 듣고(悅親戚之情話)”의 앞뒤 글자를 빌려왔는데 한글세대는 이를 설화당이니 세화당이니하며 잘못 읽기도 했단다. 이 대표는 “빵집이냐, 한약방이냐는 문의전화도 심심찮게 걸려 왔다”며 껄껄 웃었다.

79년 창립된 ‘김영사’의 유래엔 두 가지 설이 있다. 창립자인 김정섭씨의 본관인 김녕(金寧)에서 비롯됐다는 설과, 김씨 집안의 젊은이가 세웠다 해서 ‘김(金)young(젊은)’이라 붙였다는 설이 그것인데 김영사와 오랜 인연이 있는 한 출판인은 “두 가지 이야기가 모두 맞다”고 전했다. 한편 김영사의 박은주(53) 사장은 기독교 서적을 주로 내는 ‘포이에마’란 자회사를 만들었는데 이는 ‘신의 선물’이란 뜻이라고 한다. 박 사장은 “김영사가 왠지 불교 냄새가 난다는 이야기 때문에 개신교 관련 원고를 소화하기 힘들어 창립했다”고 밝혔다.

77년 세워진 종합출판사 ‘까치글방’은 영국의 명문 출판사 ‘펭귄’을 의식한 이름이다. 박종만(65) 사장은 펭귄북스의 책을 좋아했기에 국조인 까치를 떠올렸다고 했다. 짓고 보니 좋은 소식을 전하는 길조인 데다 글자 자체가 시각적으로 디자인하기에 적합해 여러모로 만족스럽다는 것이다.

1980~90년대
무작정 사전 펴서 눈에 띈 ‘개마고원’


10·26 사태의 여파로 제5공화국이 들어서면서 출판계엔 찬바람이 불었다. ‘창작과 비평’ ‘샘이 깊은 물’ 등 좋은 잡지들은 아예 강제 폐간되던 시절이었다. 그 와중에도 물밑에서 사회과학 전문 출판사들이 용틀임을 시작했다. 출판사 설립이 사실상 허가제였지만 운동권 출신 인사들은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리거나 등록을 마친 출판사를 사들여 출판운동을 벌였다. 여기에 서울 광화문에 있던 사회과학 전문서점 ‘논장’ 등이 호응했다.

이 시기, 특히 80년 전후해서는 순한글 이름의 출판사가 대거 등장했다. 그중 지금도 꿋꿋이 고급스러운 인문학 서적을 내는 ‘돌베개’(대표 한철희)를 보자. 출판사 이름은 창업자인 이해찬 전 국무총리가 지었다. 한 대표는 “만주에서 풍찬노숙하며 독립운동을 벌였던 고 장준하 선생의 저서 『돌베개』에서 빌려온 것으로 안다”고 했다. 그러면서 “독립운동처럼 상업성에 휘둘리지 말고 좋은 책을 내자는 다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동녘’ 등 비슷한 컨셉트의 출판사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등장하던 때 마찬가지로 인문사회과학 책을 내면서도 나름 색깔 있는 출판사 이름을 붙인 곳이 있다. 진보적 사회이념을 기치로 82년부터 활약한 ‘사계절출판사’다. 창업자의 부인으로 현 대표인 강맑실(54) 사장은 “당시엔 한글이름 출판사가 대세였지만 굳이 무게를 잡을 필요가 있겠나 싶어 당시 가장 흔한 다방 이름으로 짓기로 하고 알아봤는데 바로 ‘사계절’이더라”고 전했다. 이 심상치 않은 이름은 뒷이야기가 있다. 창업자가 운동권이었기에 당시 안기부에선 사계절은 소련을 세운 레닌이 내던 지하신문 이름이라며 조사를 나왔더란다. 강 대표는 “사실무근이었지만 출판에 딴죽을 걸기 위해 그랬던 것으로 보였다”고 기억했다.

『김대중 죽이기』로 이름을 널리 알린 ‘개마고원’(대표 장의덕)은 작명 과정이 눈길을 끄는 경우다. 사전을 무작위로 펼쳐 첫 단어로 이름을 지었단다. 장 대표는 “짓고 보니 ‘한반도의 지붕’이란 의미가 있어 월남한 실향민 출신으로선 남북한이 한 가족이 되는 데 기여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돼 만족스러웠다”고 했다.

2000년대
구글 본따고 부글부글 잘 되자는 ‘부글북스’


출판계도 IMF 환란 사태란 시련을 겪었지만 적어도 이때의 출판환경은 좋았다. 2003년 출판사 설립이 신고제로 바뀌면서 그간 출판계에서 ‘내공’을 닦은 이들이 너도나도 창업하고 나선 덕에 다양한 책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신진들의 가세로 출판사 이름에도 변화가 왔다. 영어, 신조어 등 이국적인 냄새를 풍기는 브랜드가 주류를 이룬 것이다.

91년 출범한 ‘그린비’는 한글 신조어 이름이 변화한 경우다. 유재건(50) 대표는 “원래는 ‘그리운 선비’ ‘그리운 비’란 향기로운 뜻으로 시작했다. 한데 95년 인터넷 도메인을 만들면서 ‘초록 벌’이란 뜻의 green bee로 변했다”며 “벌이 꿀 1리터를 모으기 위해선 100만 송이 꽃을 날아다녀야 하듯 꼭 필요한 책을 만들기 위해선 100만 번의 발품과 마우스 클릭을 마다하지 않겠다는 각오라고 해석한다”며 웃었다. 심리학 전문 출판사인 ‘부글북스’도 신조어 작명 케이스다. 정명진 대표는 “구글을 본떴는데 부글부글 번창하라는 뜻도 있어 나름 잘 지은 듯하다”고 했다.

2005년 『선비의 배반』이란 첫 책을 낸 고즈윈은 김영사 주간 출신인 고세규씨가 세운 회사다. 고 대표는 “독립을 하고 보니 사람이 잘났다고 하는 게 영 맘에 걸리던 차에 ‘신의 승리(God’s Win)’란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고 밝혔다. 성경에 등장하는 선견지명이 있는 지혜자란 뜻의 ‘프로네시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언급한 흉내· 모방이란 뜻의 ‘미메시스’도 서구형 브랜드다. SF전문 출판사인 웅진그룹의 ‘오멜라스’는 어슐러 K 르 귄의 단편소설에 나오는 밝음과 어둠이 공존하는 사회를 가리키는 말이다. 최근 큐빅 모양의 독특한 책을 낸 ‘토트’출판사는 이집트의 지혜의 신 이름이며, 그리스어로 ‘눈’을 뜻하면서 중세 유럽에서 활약한 이탈리아 건축가 알베르티가 ‘이성’의 뜻으로 사용한 ‘마티’출판사는 그 이름대로 돈 안 되는 인문학 서적을 고집하고 있다.

신세대의 자신감을 반영하듯 창업자의 이름이 들어간 출판사도 생겼다. 경제경영 전문출판사로 입지를 굳힌 ‘쌤앤파커스’는 투자자인 모 IT기업과 박시형 대표의 성을 영문으로 표기한 것이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구설에 올랐다. ‘쌤(Sam)’ 탓에 출판계에선 한동안 모 그룹이 출판계에 발을 디뎠다더라는 소문이 돌았지만 박 대표는 “전혀 사실무근”이라고 못 박았다. 게다가 지금은 지분정리를 마쳐 자신의 회사라고 설명했다.

엽기형
사회를 삐딱하게 보자는 ‘사문난적’


출판사가 많다 보니 눈길을 모으기 위해 튀는 이름을 붙인 출판사들이 있다. 성리학에서 사상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사람을 이르는 ‘사문난적’이 좋은 예다. “이 사회를 삐딱하게 보는 책을 내려 해서 붙인 이름”이란 것이 김진수 대표의 설명이다. 또 젊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는 뜻에서, 조선시대 과거시험장에서 선비들이 뒤죽박죽 사전토론을 하던 ‘난장’을 이름으로 한 출판사도 그런 경우다.

지금은 활동을 접은 상태지만 ‘남편과 원숭이’ ‘떠오르는 도끼’란 출판사도 있으니 출판사 이름이 어디까지 갈지 궁금하다.


뉴스 클립에 나온 내용은 조인스닷컴(www.joins.com)과 위키(wiki) 기반의 온라인 백과사전 ‘오픈토리’(www.opentory.com)에서 다시 볼 수 있습니다. 궁금한 점 있으세요? e-메일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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