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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석 전 삼성경제연구소 부회장 ‘곁에서 본 호암’

1910.2.12~1987.11.19
삼성그룹 창업주인 고(故) 호암 이병철 회장 탄생 100주년을 맞아 전국경제인연합회·한국경영학회·삼성경제연구소가 10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한국경제 성장과 기업가 정신’이라는 주제로 국제 학술 심포지엄을 열었다. 최우석 전 삼성경제연구소 부회장은 ‘곁에서 본 호암 이병철 회장’이란 주제로 특강을 했다. 최 전 부회장의 특강 원고를 발췌·요약했다.

최우석(70) 전 부회장은 …
호암 생전에 중앙일보 논설위원·경제부장·편집국장을 지냈다. 호암 타계 후엔 삼성경제연구소 사장·부회장을 역임했다. 삼성경제연구소를 최고의 민간 싱크탱크로 성장시킨 주역이다. ▶86~88년 중앙일보 편집국장 ▶93~94년 중앙일보 주필 ▶94~95년 일본경제연구센터 특별객원연구원 ▶95년~2003년 8월 삼성경제연구소 대표이사 사장 ▶2003년 9월~2005년 3월 삼성경제연구소 부회장


◆크고 깊은 숲과 태산

큰 산속에 있으면 그 크기나 깊이를 잘 알 수 없듯이 호암 이병철 회장도 가까이 있을 때는 크기나 깊이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떨어져보니 정말 거인(巨人)이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이 회장이 50여 년간 기업을 이루어간 역사는 한국의 산업사요, 경제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회장이 새 사업을 준비하는 것을 몇 번 옆에서 본 적이 있는데 정말 온 에너지를 쏟았다. 용인자연농원(현재 에버랜드)을 개발할 때는 온갖 자료를 다 읽고 사람을 만나고 회의를 하고 전문가에게 확인을 하고 그야말로 최후의 최후까지 전심전력을 다했다. 1980년대 초 생명공학 이야기를 자주 하고 자료를 계속 찾았는데 얼마 있다 제일제당에서 인터페론사업을 시작했다. 정부 허가 때문에 생전엔 착수하지 못했지만 자동차사업 진출을 준비할 때도 미국 크라이슬러자동차 아이어코카 회장의 자서전을 자세히 정리해오라 하여 정독하는 등 많은 준비를 했다.

70세가 넘어 반도체를 준비할 땐 훨씬 더 열성적이었다. 워낙 생소한 분야라 “왜 전도체(全導體)가 아니고 반도체(半導體)고? 반도체 원료는 뭐꼬?” 하면서 의문이 풀릴 때까지 질문을 계속했다. 반도체가 산업의 쌀로서 반드시 해야 한다는 것을 들었지만 스스로 확인하기 위해 묻고 또 물은 것이다. 이런 100% 준비 습관은 일찍부터 체질화된 것이었다. 40대 중반 제일모직을 만들 때도 미국의 전문가가 한국 기술로는 어렵다면서 모직공장엔 적어도 24개 항목의 준비가 완벽해야 한다고 하기에 48개 항목에 걸쳐 미리 준비해놓은 메모를 보여줬더니 아무 말도 못 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이렇게 준비를 하고도 담당자를 불러 몇 번이나 점검회의를 한다. 그러고는 몇 차례에 걸쳐 “아직 미흡하다. 더 연구해 봐라” 하며 돌려보낸다. 다시 고치고 또 고쳐 더할 것이 없다고 생각될 무렵이 돼서야 “이제 계획은 된 것 같은데 너들 그렇게 할 자신 있나?” 하고 다시 묻는다. “저희들이 힘을 합쳐 반드시 성공시키겠습니다” 하는 다짐을 받고서야 “그런 각오라 하니 그럼 한번 해봐라” 하는 허락이 떨어진다.

마지막 정열을 쏟은 반도체를 할 땐 일주일에 한 번씩 기흥(器興) 건설현장으로 가 점검을 하곤 했다. 보통 1년6개월이 걸리는 공장 건설을 6개월로 당기느라 돌관(突貫) 작업을 하는 바람에 서울에서 회의를 할 틈이 없어 현장으로 직접 찾아간 것이다. 사업을 시작할 때는 이 회장 자신이 열병 앓듯이 거기에 매달리고 주위 사람들도 비슷한 증상이 되어 집단 최면 상태에서 일을 밀고 나가는 것 같았다.

◆시스템의 창안과 활용

이 회장이 이렇게 초인적인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일을 하는 시스템을 만들어 잘 활용했기 때문이다. 신입사원 공채(公採)제도, 비서실 운영, 체계적인 연수 시스템 등이 대표적인데 지금은 보통 쓰이고 있는 제도지만 삼성이 처음 시작한 50년 전만 해도 획기적인 것이었다.

공채라도 당시에는 기술계나 상법계(商法系) 등 전공을 제한했는데 삼성은 인문계 등도 이유를 들어보고 대담하게 뽑았다. 당시 어떤 사람은 사회학과를 나와 응시자격이 없었으나 앞으로 노동문제가 중요해질 것이므로 삼성에서 노동문제를 꼭 한번 다뤄보고 싶다고 하여 입사를 하고 비서실을 거쳐 후에 계열사 사장까지 지냈다. 이 회장은 기업을 하려면 인문적 지식이 중요하다는 말을 많이 했다. 두 손자가 같이 대학에 갈 때도 경영학은 회사에 들어와 배우면 될 터이니 기본적인 것을 배우라 하여 한 사람은 동양사학과에, 한 사람은 서양사학과에 갔다고 들었다.

신입사원 면접시험 때는 이 회장이 직접 참석했다. “물론 한번 봐서는 잘 모르지만 좋은 인재를 뽑기 위한 정성을 보이기 위한 것”이라는 말을 했다. 관상사가 참석한다는 소문이 있었으나 사실이 아니다. 얼굴을 유심히 살피는 것은 사실이지만 관상을 보기보다 얼굴 풍모나 몸가짐을 본다고 말했다. “어딘지 모르게 좀 이상한 느낌이 드는 사람은 안 좋고 편안하고 평범한 사람이 좋은기라”라는 말을 했다. 유교적 체질이 몸에 배어 있는 이 회장은 말투나 행동거지를 아주 중시했다. 예의 바르면서도 의욕 있고 분명한 사람을 선호했다. 신입사원들은 어디까지나 가능성 있는 원석(原石)이기 때문에 이들을 잘 갈고 다듬어서 유용한 인재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삼성 창업주 고(故) 호암 이병철 회장 탄생 100주년을 맞아 전경련·한국경영학회·삼성경제연구소가 10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공동 개최한 국제 학술 심포지엄에서 참석자들이 조석래 전경련 회장의 개회사를 듣고 있다. 국내외 재계·학계 인사 500여 명이 참석했다. [연합뉴스]
◆대담한 결단과 세심한 배려

이 회장의 일하는 스타일은 대담세심(大膽細心)으로 표현할 수 있다. 1965년 한국비료공장을 지을 때 단일 요소비료 공장으로는 세계 최대인 연산 36만t 규모로 지었다. 그때 일본 공장들은 18만t을 넘지 않았고 30만t의 소련 공장이 최대 규모였다. 차관 규모도 당시 200만 달러 정도면 공장 하나를 지었는데 무려 4300만 달러를 들여왔다. 수원에 전자공장을 처음 만들 때도 50만 평(165만㎡) 이상을 잡으라고 하여 모두가 놀랐는데 그것도 얼마 안 되어 모자라게 되었다. 450만 평(1485만㎡)으로 시작한 용인자연농원도 마찬가지다. 반도체사업을 본격화할 때는 그 규모가 워낙 커 삼성의 명운을 걸다시피 했다. 초기에는 상당히 고전했고 그룹 안팎의 우려가 많았는데 전혀 동요하지 않고 밀고 나갔다.

그렇게 스케일이 컸지만 세심할 때는 한없이 세심했다. 용인에 호암박물관을 지을 때는 번듯하게 최첨단으로 지으라고 지시하면서 박물관 도록(圖錄)의 크기나 색깔·모양까지 일일이 지시했다. 동방플라자를 지을 때는 수시로 공사장에 들러 화강석 외벽 사이의 간격을 얼마로 할 것인지, 호암아트홀에 의자를 몇 개 넣을 것인지를 따지기도 했다. 한번은 신세계백화점의 대책회의를 구경한 적이 있는데, 이웃한 롯데백화점보다 규모가 작아 매출이 적을 수밖에 없다고 하자 그럼 단위면적당 매출은 어떻게 되는지를 물었다. 정육 코너의 고기가 싱싱하게 보이려면 조명 색깔을 잘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했다.

◆인재개발과 용인(用人)의 천재

이 회장이 그렇게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람을 적재적소에 잘 썼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특성을 정확하게 파악해 귀신같이 부렸다. 정말 장(將)의 장(將) 그릇이었다. 일단 일을 맡기면 전권을 주어 마음껏 능력을 발휘하게 했다. 신상필벌(信賞必罰)이 엄해 잘하는 사람은 한없이 뻗어갔지만 어름어름하면 견딜 수가 없었다. 파격적으로 발탁하고 놀랄 정도의 대우를 했다. 초기 삼성에서 일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일을 맡기고 또 맡겨 밤잠을 제대로 못 잘 정도였는데 보너스를 받아보면 영(0)이 하나 더 있었다 한다.

이 회장 주변에는 기발하고 창조적인 기획통, 치밀하고 분석적인 관리통, 돌파력이 뛰어난 불도저형 등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있어 이들을 잘 조합해 부렸다. 공장을 지을 때는 불도저형을 써서 밀어붙이고 공장이 완성되면 관리형을 넣어 조직을 안정시켰다. 공격형과 안정형은 그 나름대로 문제가 있으므로 오래 두지 않고 적절히 교대시켰다. 또 외국과 합작사업도 많이 했는데 합작처가 무리를 한다 싶으면 싸움꾼을 넣어 사정없이 싸우게 했다. 그 넣고 빼는 타이밍과 리듬이 귀신 같았다.

이 회장의 주변에는 각기 다른 재주를 가진 인재가 무수하게 많아 긴요할 때 활용하는 것 같았다. 보통사람은 대개 10명 정도, 능력 있는 사람은 30명 정도를 직접 관리할 수 있다 하는데 이 회장은 100명 넘는 사람을 직접 활용하는 것 같았다. 일하는 사람들도 각자가 모두 각별한 신임 아래 특별한 일을 한다고 믿는 것 같았다.

인간 집단의 30%는 우수하고 10%는 떨어지며 나머지 60%는 환경과 지도 여하에 따라 달라진다는 생각이었다. 일을 맡겨보며 점점 그릇을 키워가는데 더 이상 가능성이 없다 싶으면 다시 부르지 않았다. 이 회장은 불러 야단을 치는 것은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고 안 되겠다 싶으면 다시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온정 때문에 인사를 머뭇거리면 조직을 병들게 하고 결국은 기업을 망하게 한다고 강조했다.

◆끝없는 긴장과 빈틈없는 절제

호암은 생전에 책을 많이 읽었다. 소설에서 역사서까지 가리지 않았다. 호암은 자신을 형성하는 데 가장큰 영향을 미친 책으로 『논어 』를 꼽았다. 사진은 자택 서재에서 독서 중인 호암. [삼성그룹 제공]
이 회장이 많은 인재를 수족같이 부려 많은 일을 한 데는 상시 긴장과 냉철한 자기절제가 핵심에 자리 잡고 있었다. 24시간 일을 생각하고 있다고 보일 정도로 긴장을 풀지 않았다. 골프를 치는 것도, 여행을 하는 것도, 휴식을 취하는 것도 사업이 밑바탕에 있었다. 이 회장은 낭비를 아주 싫어했는데 돈의 낭비는 말할 것도 없고 시간의 낭비, 일의 낭비도 아주 질색을 했다. 밑의 사람들과 회식을 할 때 주문을 많이 해서 음식을 남기는 것도 싫어했다.

자신의 시간도 빈틈없이 관리했다. 출퇴근 시간도 일정하고 골프 하는 날, 붓글씨 쓰는 날도 일정했다. 출근할 때는 그날 할 일을 적은 메모지를 들고 나왔다. 그걸 펴놓고 사람을 부르고 전화를 하고 회의를 소집하고 현장 점검을 했다. 매일 도쿄 지사와 통화를 했는데 전화가 연결되면 비서가 두툼한 수첩을 앞에 갖다 놓았다. 거기에는 도쿄에 지시해야 할 사항들이 적혀 있었다. 그걸 하나씩 짚어가며 전화를 했는데 줄을 긋기도 하고 추가로 적어 넣기도 했다. 이런 방식은 이 회장이 회의를 주재할 때도 마찬가지여서 함부로 보고를 못했다.

오후 5시쯤 되면 퇴근할 준비를 하는데 아침에 가져온 메모를 정리해 끝낸 것은 없애고 새로운 것은 추가했다. 그걸 집으로 가져가서 VCR 틀어보듯 다시 점검한다고 한다. 그 다음 날 다시 나와 “어제 이런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다시 자세히 해봐라” 할 때도 가끔 있다. 이런 일과는 도쿄에 출장 가서도 반복된다고 들었다. 그 주가 끝나면 일주일분을 다시 점검하고 한 달 뒤에는 한 달분을 정리해 미흡한 부분을 챙긴다. 연말에는 미해결한 부분을 크게 정리해 집무실 유리판 밑에 넣어놓게 했다. 그래서 한번 시작한 일은 끝날 때까지 계속 미결사항으로 남아 있었고, 한번 떨어진 지시사항은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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