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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오늘] 일제 경찰, 생계 위해 거리 나온 ‘어린이 행상’ 단속 나서다

1910년대 서울 종로의 땔감장수를 찍은 사진. 10살 남짓한 아이 둘이 나뭇짐을 잔뜩 실은 소 한 마리씩을 끌고 와 고객을 기다리고 있다.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캐러멜·과자·사이다 등 부피가 작고 가벼운 새 상품이 나온 뒤에는 이들이 ‘소년 행상’의 주력 상품이 되었다. (『사진으로 본 한국백년』)
어린이가 ‘작은 사람’이 아니라 ‘보호와 양육’의 대상이라는 생각은 18세기 중엽 이후에야 싹텄다. 19세기 초엽에는 세계 제일의 국력을 과시하던 영국에서조차 예닐곱 살 먹은 아이들이 광산에서 탄차(炭車)를 끌었다. 선진국에서 유소년 노동이 금지된 것도, 소아과라는 전문분과가 생긴 것도 모두 19세기의 일이었다. 그러니 어린이를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어른과는 다른 존재로 인식하기 시작한 지 이제 겨우 100년 남짓 되었을 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어린이를 ‘아이’ ‘아해’ 또는 ‘동몽(童蒙)’이라 불렀는데, 몽(蒙)이란 덩굴풀의 일종으로 그늘지다, 어둡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래서 어리석은 것을 몽매(蒙昧)하다 하고 그를 깨우치는 일을 계몽(啓蒙)이라 한다. 어린이는 단지 지적으로만 덜 깬 사람이었을 뿐, 육체적으로는 어른과 별로 다를 바 없는 대우를 받았다. 10살 안팎의 사내아이들이 소 먹이고 나무하고, 그 나이 또래의 여자아이들이 아이 보고 빨래하는 일은 지극히 당연했다.

1920년대부터 어린이라는 말이 생기고 어린이를 ‘미래의 동량(棟樑)’으로 잘 키우자는 사회적 계몽이 확산되었지만, 유년 노동은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일자리들이 가정 밖에서 어린이의 일거리를 늘렸다. 1931년 통계에 따르면 30인 이상을 고용하는 공장 노동자 중에서 15세 미만의 어린이가 점하는 비중은 8%에 달했다. 청장년들이 징병·징용으로 끌려간 1940년대에 그 비중은 20%까지 늘어났다.

1934년 2월 10일, 서울 종로경찰서 보안계 주임 고사카(小坂)는 거리에서 행상하는 소년 소녀들을 단속하겠다고 밝혔다. “8~9세 아이들이 장사치가 되어 과자와 캐러멜 등을 억지로 사달라는 것은 일반에게 불쾌한 감정을 줄뿐더러 소년 보호와 교양상 큰 문제이다. 소문으로는, 불량한 가정에서는 어린아이들을 영업적으로 장사를 시켜 그 수입으로 어른들이 술을 사다 먹는 일까지 있다고 한다. 이는 순진한 아이들의 선량한 동심을 어지럽히는 일이고 또 제2세 국민의 교화 문제로도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생계를 잇고자 거리에 나온 아이들을 무작정 잡아 들이는 것 말고 경찰이 할 일은 없었다.

한국 사회가 전례 없는 번영을 구가하고 있는 오늘날에도 밥 굶는 어린이가 적지 않고 ‘알바’ 자리를 찾아 헤매는 청소년은 셀 수 없이 많다. 어린 자식이 벌어 온 알바비로 술 먹는 부모가 지금에라고 없으란 법은 없지만, 대개는 가난이 시키는 일이다. 출산율을 높이려면 먼저 자식의 미래에 대한 걱정부터 덜어 주어야 한다.

전우용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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