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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암 탄생 100주년] 이병철 회장 9년간 보좌한 손병두 KBS 이사장 인터뷰

호암 탄생 100주년 1910. 2. 12 ~ 1987. 11. 19
삼성 창업주인 고(故) 호암 이병철 회장에 대한 추모 열기가 뜨겁다. 올해가 탄생 100주년이라는 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20세기를 살다간 그를 21세기 사람들이 기리는 이 열기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손병두 KBS 이사장은 “호암은 일개 기업가가 아니라 국가 발전이란 명제를 앞에 놓고 고민했던 위대한 사상가이자 플래너(planner)”라며 “그분의 가치를 새삼 알게 되기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다. 호암이 오늘날의 삼성그룹 윤곽을 만든 1970년대 회장비서실에 근무하며 9년여 동안 호암을 가까이에서 보좌한 손 이사장을 만나 알려지지 않은 호암의 진면목을 들어봤다.

-뜨거운 추모 열기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호암이야말로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분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나라를 잘살 수 있게 할까를 고민했고, 그 방안으로 기업가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사업을 정할 때는 돈이 되느냐보다 무엇을 생산하면 국민에게 도움이 될까를 늘 생각했습니다. 제당도, 모직도, 비료도, 전자도, 반도체도 다 그랬지요.”

-호암은 86년 자서전 『호암자전』의 서문에서 “어떤 때는 사업만 앞세운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사회의 곡해(曲解)는 한 개인에게는 때로 과중했다”고 적었는데요.

“그분은 10년, 100년을 앞서 나갔어요. 나라를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했어요. 몰이해에서 오는 비난이 많았지만 그걸 다 감수했지요. ‘국가관’이 확고하게 뒷받침된, 생각의 차원이 다른 기업가였어요.”

-어떤 사례가 있나요.

“당시 세대제지라고 업계 2위의 제지회사가 어려워져 삼성에 인수해 달라는 요청을 했어요. 정부도 그걸 바랐고요. 회사 소유의 땅이 많은 데다 조건도 좋아 인수하자고 호암께 건의했지요. 그런데 호암은 ‘혼자 독점하면 안 된다. 같이 경쟁해야 한다’면서 거절했지요. 3공 때 김용환 재무부 장관 시절 단자회사를 도입할 때 일도 있습니다. 정부는 삼성에 신청하라고 했지요. 그 얘기를 듣고는 호암은 대뜸 ‘그거 고리대금업 아니가. 난 그렇게 돈 벌고 싶지 않다’고 하셨지요. 철저하게 정도(正道)로 가려고 생각했던 분입니다.”

손 이사장은 “그동안 호암에 대한 평가가 너무 기업가적인 측면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면서 “그건 호암을 반쪽만 본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제부터 하고 싶은 얘기”라며 말을 이어갔다.

“호암은 한때 정치인이 되려고 고민했지요. 그런데 적성에 맞지 않아 접었어요. 그 다음에 언론을 통해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중앙매스컴을 창설했지요. 사재로 삼성문화재단도 만들었습니다. 국악 진흥 노력도 많이 했습니다. 동양방송(TBC)에 ‘국악의 향연’이 오후 11시에 방송됐는데, 광고가 붙지 않자 본인이 직접 후원해 프로그램을 진행했어요. 도의 교육을 해야겠다는 취지에서 성균관대를 인수했고요.”

-성균관대 운영을 그만둔 사연이 있었나요.

“당시 호암은 상당한 금액을 지원했습니다. 그런데 이공계 대학을 수원캠퍼스에 세우려고 할 때 학생회장이 학생처장 멱살을 잡은 일이 있었어요. 그 소식을 듣자마자 호암은 운영을 포기했어요. ‘도의 교육을 그토록 했는데 어떻게 학생이 선생님 멱살을 잡느냐. 그런 학교는 필요 없다’는 것이었지요.”

-호암이 아쉬워한 일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농업 발전을 위해 심혈을 기울여 세웠던 공장을 하루아침에 헌납해야 했던 한국비료 사건을 많이 가슴 아파했습니다. 한비사건은 진실이 밝혀지지 못한 채 호암이 뒤집어썼습니다. 속죄양이 된 것에 대해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지길 원했지요. 자동차 사업 무산도 아쉬워했지요. 호암은 그때 미래를 위해선 자동차사업을 꼭 해야 한다고 봤습니다. 세계적 자동차 메이커가 되기 위해선 도요타와 손잡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허락을 안 했습니다. 그 무렵 중국 저우언라이 총리가 반공국가에 투자하는 기업과는 교역하지 않겠다고 천명하자 국내에 진출해 있던 도요타가 철수한 일이 있었습니다. 박 대통령이 그걸 문제 삼은 겁니다. 그때 포드·GM 등 다른 세계적 자동차 메이커들은 이미 국내에 다른 제휴선이 있었고, 도요타를 제외하면 제휴할 수 있는 곳이 없었습니다.”

-호암과 박정희 대통령의 관계는 어땠나요.

“애증관계였어요. 정치인 박정희와 경제인 이병철이 힘겨루기를 한 셈이지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호암이 진두지휘해 용인 자연농원을 지을 때였어요. 한옥을 짓는데 호화 별장이라고 악소문이 났어요. 그걸 듣고 박 대통령이 느닷없이 방문했습니다. 삼성 실무진에게 ‘내가 왔다고 (호암에게) 연락해라’고 지시했어요. 그때 호암은 20분 거리의 안양에 있었는데, 끝내 오지 않았습니다. ‘남의 집에 오려면 사전에 간다고 연락을 하고 와야지, 불쑥 나타나면 예의에 어긋나는 일 아니냐’고 하셨지요.”

-삼성도 사업에 지장이 있었겠습니다.

“삼성은 곤욕을 많이 치렀습니다. 세무조사를 매년 받다시피 했어요.”

-호암이 평소 존경한 사람은 누구인가요.

“장보고 장군을 특히 존경했어요. 해상 무역을 통해 신라를 부흥시킨 공이 크다고요. 이승만 전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도 존경했습니다. 이 전 대통령은 건국에 이어 한국전쟁을 이겨내고 시장경제체제를 구축한 분으로 초대 대통령에 대한 평가를 제대로 해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또 맥아더 장군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공산치하에 들어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면서 은혜를 잊어선 안 된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어요.”

노년의 호암은 서예를 즐겼다. 그는 “스스로 마음을 바로잡기 위해 글씨를 써올 따름”이라고 말했다. 사진은 연구개발의 정신을 담은 ‘무한탐구(無限探求)’를 쓰고 있는 호암. [삼성그룹 제공]
-‘인재제일’을 신조로 삼은 호암의 사람 욕심은 어느 정도였나요.

“사람 욕심은 정말 많았습니다. 일을 잘한다는 얘기를 들으면 꼭 데려오라고 하셨어요. 한국은행·산업은행 직원 스카우트나 학생군사교육단(ROTC) 출신을 예편 전에 채용한 것은 삼성이 처음입니다. 신입사원 면접에도 정성을 쏟았어요. 면접을 두 번 본 일도 있습니다.”

-인사 부탁이 많았을 텐데요.

“친인척이 면접에 올라오기도 했는데, 실력이 안 되면 ‘너 공부 더 하고 와라’고 돌려보냈습니다. 그러니 인사에 정실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지요. 군사정권 때 군인들의 인사청탁이 많았는데 굉장히 경계했습니다. 철저히 조사해서 괜찮은 사람이라고 검증돼야만 썼습니다.”

-인재 양성 방식도 정평이 나 있지요.

“인재 양성은 아주 혹독했습니다. 공부 안 하는 임원은 배겨날 수 없게 합니다. 일본 출장에서 책을 한 아름 갖고 돌아와서는 해당 임원들에게 읽히라고 합니다. 그 뒤 독후감을 받게 하는데, 임원들이 바쁘니까 부하직원에게 독후감을 쓰게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걸 호암이 압니다. 점심시간에 불러 질문을 해 모르면 혼을 냈습니다.”

-호암이 수많은 사장과 임원들을 휘어잡는 특별한 방법이 있었나요.

“경영에 동물적 감각이 있는 분이었습니다. 공장을 휙 둘러보고는 노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를 간파했어요. 73년 1차 오일쇼크 때였습니다. 비서실에서 에너지 10% 절감안을 만들었더니 계열사 공장들이 펄쩍 뛰었습니다. 그동안 계속 절약했는데 어떻게 10%를 더 절약하느냐는 반발이었지요. 호암이 보고를 듣고는 당시 삼성그룹 최고의 공장이었던 제일모직 대구공장으로 가셨어요. 회장이 오신다니 공장에서 분수를 틀어놨지 않겠습니까. 호암이 분수대로 바로 향하시더니 공장장에게 ‘분수 트는 데 전기료가 얼마나 들어가느냐’고 묻더군요. 공장장이 대답을 못 하고 머뭇거리자 ‘이것도 모르면서 어떻게 공장장을 하고 전기를 아끼느냐’며 나무랐어요. 그러고는 바로 공장장을 해임시켰습니다. 그 뒤로는 각 현장에서 에너지 절감을 위한 아이디어가 쏟아졌습니다. 본질적으로는 호암이 누구보다 정보가 많고, 많이 아니까 임원들이 따라갈 수밖에 없었지요. 호암은 정말 공부와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호암은 어떤 방식으로 공부를 했습니까.

“집중적으로 공부했습니다. 그런 점은 이건희 전 회장이 빼닮은 것 같습니다. 일례로 유실수를 키울 때 일본에서 밤을 3대째 재배하는 사람을 불러 거름은 어떻게 줘야 하는지 등 아주 세밀한 것까지 공부하는 식입니다.”

-호암은 어떤 스타일의 기업가라고 할 수 있을까요.

“신규 사업을 하든 건물을 짓든 무엇이든 창조하고 있어야 하는 분이었습니다. 호암은 잘나가는 기업엔 관심을 두지 않고 다 위임했습니다. 문제 있는 기업과 새로 시작한 기업에 몰두했습니다. 또 어떤 사업이든 최고를 지향했습니다. 돌다리를 두들겨보고 건너는 사람을 보고서야 건넌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치밀하게 연구하고 계획했습니다.”

호암은 기업의 영속성에 관심이 많았다. 연구도 많이 했다. 일본의 미쓰비시와 미쓰이, 미국의 록펠러 가문 등이 계속 발전하는 원동력이 무엇인지 조사해 보고하도록 시켰다. 손 이사장은 “호암이 3남(이건희 전 회장)에게 삼성의 경영을 상속한 것도 기업의 영속성을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호암은 기업을 사랑했습니다. 기업이 영속하기 바랐지요. 그래서 상속 자체도 능력을 본위로 한 것입니다. 한번은 제게 그러시더군요. ‘셋째는 대기업을 경영할 만한 자질이 된다’고요. 그 뒤 경영권을 바로 넘긴 것이 아니라 경영수업을 철저히 시켰습니다. 사람 만나고 응대하는 것까지 말입니다.”

기업의 영속성에 대한 오랜 연구와 고민 뒤 호암이 다다른 결론은 ‘완전 기업’이었다. 그것은 21세기를 살고 있는 기업인 모두의 과제이기도 하다.

“완전 기업이란 개념은 호암이 직접 고안한 것입니다. 조건은 세 가지였어요. 첫째, 이익을 내야 한다는 겁니다. 기업이 적자를 내면 형법에는 없지만 국민에게 죄를 짓는 게 된다는 것이었어요. 종업원이 일자리를 잃고, 국가는 세금을 못 걷고, 은행은 이자를 못 받기 때문이라는 거지요. 둘째는 품질에 하자가 없어야 한다는 겁니다. 셋째는 가격은 적정한 이윤만 남겨야 한다는 겁니다. 가격이 100이라면 소비자가 느끼는 가치가 120은 되도록 해야 한다는 거지요. 사실 이번에 도요타자동차도 이것이 안 돼 문제가 생긴 겁니다. 시장경제에서 기업이 살아남으려면 소비자가 제품가격 이상의 만족을 느끼게 해줘야 한다는 거였어요.”

글=이상렬 기자, 사진=김경빈 기자


손병두 이사장(69)은 …

삼성 회장비서실에서 1972~81년 9년여 기간 과장·차장·부장·이사로 근무하며 신규 사업과 전략, 사원 연수 등을 담당했다. 신입사원들이 연수에서 첫 번째로 듣게 되는 ‘삼성의 경영이념과 철학’ 강의를 했다. ▶88~94년 동서경제연구소 대표이사▶97~2003년 전국경제인연합회 상근 부회장▶2005년 6월~2009년 6월 서강대 총장▶2009년 9월~현재 KBS 이사장▶2009년 10월~현재 삼성고른기회장학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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