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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폐형·수동형 … 드라마 여성 캐릭터 뒷걸음질하나

미실(고현정)의 카리스마와 박기자(김혜수)의 ‘엣지’는 어디로 갔는가. 최근 지상파 방송사의 인기 드라마들이 설득력 없는 여성 캐릭터로 빈축을 사고 있다. 뚜렷한 욕망을 지닌 주체적 여성을 찾기 어렵다. 이리저리 주변 상황에 휘둘린다. 이른바 ‘민폐 캐릭터’다. 가족극 안에서도 ‘여여 갈등’만 부각시켜 신파를 자아낸다. 한국 드라마의 고질적인 문제로 지적돼 왔지만, 최근엔 인터넷을 중심으로 젊은 시청자들이 이에 반발하고 나섰다.

시청률 35%를 기록하며 인기리에 방영 중인 KBS2 ‘추노’는 ‘민폐 언년(혜원) 리스트’가 돌 정도로 혜원 캐릭터에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KBS 제공]
◆수동적이거나 여여 갈등=‘언년이 때문에 대길이 집 망함/ 송태하 스승 손도 못써보고 죽음/ 시골 노인집 헛간 부서짐/ 송태하 구하라는 나라 안 지키고 연애질 중…’. 요즘 포털 게시판을 통해 확산되고 있는 ‘민폐 언년(혜원) 리스트’다. KBS2 드라마 ‘추노’의 여주인공 혜원(이다해)의 ‘민폐 행각’ 24개를 꼬집었다. 수동적인 캐릭터를 문제 삼는 한편, 황당한 사건 전개까지 모두 혜원의 탓으로 돌린다. 캐릭터에 대한 분노에 가깝다.

KBS 시청자 게시판엔 “자신도 노비이면서 태하 신분을 따진다” “화살이 날아오는데 조신하게 고개 돌리며 ‘아아’ 소리나 내다니…” 등 비아냥이 쏟아진다. 네티즌 백종은(bjeking)씨는 “여주인공이 비중도 역할도 없이 그저 멍한 표정 짓다가 우는 게 ‘아이리스’의 김태희와 똑같다”고 지적했다. 추노꾼을 따라다니는 설화 역시 밥도 못하고 말도 못 지키는 ‘민폐 캐릭터’로 그려진다.

MBC 수목극 ‘아직도 결혼하고 싶은 여자’는 이신영(박진희) 등 세 주인공에게서 커리어우먼의 욕망을 읽을 수 없다는 불만이 많다. 골드미스들의 사랑에 대한 갈증을 보여준다는 기획이지만, 몽상가에 가까운 3인방에 동화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남자가 선물한 초콜릿 안에 반지가 들었나 깨물어보는 식의 에피소드는 KBS 개그콘서트의 ‘남성인권보장위원회’가 조롱하는 여자의 단면과 다를 게 없다.

KBS2 주말극 ‘수상한 삼형제’에선 여자들 사이에 불화를 집중 조명하는 데 빈축이 쏟아진다. 시어머니 전과자(이효춘)가 둘째 며느리 도우미(김희정)를 사사건건 트집 잡고 도둑 취급까지 한다. 고부 갈등이 홈드라마의 핵심이라지만 도우미의 설정이 지나치게 신파적이라는 평가다.

수목 드라마 ‘아직도 결혼하고 싶은 여자’는 커리어우먼의 구체적인 욕망을 짚어내지 못하고 겉돈다는 지적이다. [MBC 제공]
◆현실 변했는데 설정 구태의연=시청자의 거부감은 시대 변화와 맞지 않는 캐릭터에서 온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향상되고 전문직 진출이 늘어났는데도 ‘여주인공=가녀린 멜로’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다. 문화평론가 정덕현씨는 “과거 신파형 드라마는 스스로를 슬픈 운명에 빠뜨리는 수동적 캐릭터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제공했지만, 요즘은 남녀 모두 이런 캐릭터에 감정이입을 못 한다”고 지적했다. 같은 ‘막장 드라마’라도 신파 며느리보다 ‘아내의 유혹’ 같은 복수극에 공감한다는 것이다.

남자 중심 스토리의 빈틈을 여자의 ‘민폐’로 메우는 안이한 구성도 문제다. ‘민폐 언년 리스트’가 지목하는 장면들은 대체로 위기의 여성을 남자가 초인적인 능력으로 구할 때다. 초자연적인 힘으로 긴박한 국면을 타개하는 그리스 비극의 ‘데우스엑스마키나’에 비견된다. ‘추노’의 천성일 작가도 “혜원 캐릭터는 다른 주인공들에 비해 구체적으로 짜놓지 못해 극 흐름에 따라 흘러가는 면이 있다”고 털어놨다.

◆대작 홍수 속에 여성 설 자리 없어=시청자들의 조롱은 지난해 다채로운 여성 캐릭터가 각광 받은 것과 대조된다. MBC ‘선덕여왕’ ‘내조의 여왕’과 SBS ‘스타일’ 등은 여자들의 섬세한 승부수를 보여주며 ‘언니들의 정치드라마’ 가능성을 열었다. 특히 ‘스타일’은 민폐형 캐릭터 이서정(이지아)이 조연으로 몰락하고, 도도한 프로 박기자에 포커스가 집중되기까지 했다.

여성 캐릭터의 빈곤은 요즘 드라마가 남성의 굵은 액션 위주로 짜인 것과 무관치 않다. 수백억대 물량 공세로 시청률 승부를 보려 할 뿐 캐릭터에 대한 세심한 고민이 부족한 것이다. 문제는 올해 차기작도 ‘자이언트’ ‘로드넘버원’ 등 대하·전쟁물이 다수라는 사실. 지금 ‘언년’에게 쏟아지는 화살은 롤모델 여성 캐릭터가 없는 상황에서 시청자의 갈증을 반영하는 셈이다.

강혜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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