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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31) 전쟁통의 가족

백선엽 신임 국군 1군단장(오른쪽)이 부산 임시 경무대에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진급 신고를 마친 뒤인 1951년 4월 15일 저녁김활란 공보장관과 신성모 국방장관(왼쪽부터)이 베푼 만찬에 참석했다. [백선엽 장군 제공]
어둠 속을 달려 도착한 곳이 어디였는가에 대한 기억은 지금 내게 없다. 부관이 그 집을 미리 파악해 두고 있었던 모양이다. 부산 시내 어느 한 주택이었다. 전쟁통이라 여러 가족이 그 작은 집에 함께 섞여서 살고 있었다. 지프에서 내려 집 문으로 들어섰다. 부관이 먼저 기별을 했던가 보다. 방 한 칸에 살면서 몸을 추스르고 있던 아내가 기척과 함께 방문을 나왔다.



6월 25일 그 아침 이후, 열 달간 가족의 안부도 몰랐다

내 아내는 키가 작은 편이다. 10개월 만에 보는 아내는 더 작고 말라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열병을 계속 앓았단다. 가장이 전장으로 사라지고 난 뒤 아내가 겪어야 했던 고생이야 뭐라고 새삼 이야기할 것도 없었다. 아내는 그저 울고만 있었다. 아무 소리 없이 울며 서 있었다. 단칸방에는 어두운 백열등이 희미하게 켜져 있었다. 그 바닥에서 놀고 있던 네 살 된 딸도 내가 낯설었던 모양이다.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금세 제 아버지를 알아보고 품으로 달려들었다. 내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도 뭔가 뜨거운 게 울컥하고 치밀어 올랐다. 가족에 대한 그동안의 깊은 그리움이 뭉쳐진 감정이었다.



별리(別離)…. 전쟁 중에는 수많은 사람이 그리운 가족과 서로 헤어지는 순간을 마주친다. 누구는 이승을 떠나면서 영원히 가족과 헤어지고, 누구는 이 땅 위에 함께 살아 숨쉬면서도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서로 다시 만나지 못하는 이별의 고통을 겪는다. 그에 비하면 나는 행운아다. 전쟁통에 이리저리 누비느라 만나지 못했던 가족들과 다시 상봉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국토를 지키느라 스러져간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의 희생과 고통에 비한다면 나와 내 가족이 겪었던 이 이별은 아무것도 아닐 게다.



그렇게 마음을 추슬렀다. 전쟁통의 살림살이는 말할 필요가 없었다. 누추한 방, 초라한 이불, 변변치 못한 식기 등이 방 안에 이리저리 널려 있었다. 전쟁통의 그 모습이다. 당시의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었던 그 모습 그대로다. 마음이 아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가장으로서는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없는 사람이다. 1950년 6월 25일 그 아침에 집을 뛰어나간 뒤로는 가족의 생사를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다. 서울이 적의 수중에 떨어졌을 때도 국군 1사단장을 지아비로 둔 내 아내는 그곳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서울 신당동 집에서 외곽으로 피란을 갔던 모양이었다. 다행히 북한군의 눈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발각됐더라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북한군의 탱크에 밀려 낙동강 전선까지 내려갔을 때는 가족의 안부를 떠올릴 여유가 없었다. 북한군의 총공세를 이겨내고 북진을 하면서 서울을 탈환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서울에 진입한 뒤 서대문 근처 녹번리 파출소에 사단 지휘소(CP)를 차렸을 때도 가족을 만나지 못했다.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이 지휘하는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해 먼저 서울에 들어왔던 동생 백인엽 17연대장(대령)을 만나 가족의 안부를 듣는 데 만족해야 했다. 동생은 당시 경무대 경호와 수도경비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는 “어머니와 형수 다 무사하다”고 말했다. 나는 당시 미 1군단의 주공격 사단으로 평양을 향해 곧바로 진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촌각을 다투는 상황에서 지휘관이 사사로이 가족을 찾아 만날 수는 없었다.



평북 운산에서 중공군을 만나 밀려 내려오고, 그들에게 거듭 서울을 내준 51년의 1·4 후퇴 상황에서도 가족을 챙기지 못했다. 보다 못한 부관 하나가 나서서 “가족들을 부산으로 대피시켰다”고 보고해 그런 줄 알았다. 그 가족을 피란지인 부산에서 다시 만난 것이다.



자격 없는 가장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오랜만에 만난 아내지만 달리 할 말은 별로 없었다. 미안하고 안쓰럽고, 그래서 더욱 할 말이 없어지는 궁색함. 불을 끄고 누웠지만 말을 길게 이어가지는 못했다.



잠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내 희미한 의식의 한쪽에서 떠오르는 장면들이 있었다. 수많은 가족이 살아서 헤어져 다시 못 보는 상황에 닥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승과 저승의 삶으로 나뉘어야 했던 비극의 서막, 50년 6월 25일의 아침이었다.



머릿속 어딘가로 내가 신당동 집의 대문을 나서고 있는 장면이 떠올랐다. 아침 7시에 걸려온 다급한 사단 참모의 목소리가 전화통을 크게 울리고 있었다. “사단장님! 북한군이 밀고 내려옵니다. 개성을 이미 뺏겼습니다….”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늘 있었던 북한군과의 작은 충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당시 남한 땅이었던 개성이 이미 무너졌다는 얘기는 무슨 의미인가. 그럼 북한의 전면적인 침공이라는 말인가. 그 참혹한 6·25는 그렇게 내 앞에 다가왔다.



백선엽 장군




두 번째 이야기 ‘임진강을 넘어온 적’ 내일부터 연재합니다



백선엽 장군의 6·25 전쟁 회고록 첫 단락을 넘깁니다.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으로 펼쳤던 1950년 10월~1951년 4월까지의 상황을 마감합니다. 그다음으로는 ‘임진강을 넘어온 적’을 연재합니다. 50년 6월 25일 개전 상황과 낙동강 전투, 서울 탈환과 평양 입성의 장면들이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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