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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오늘] 구한말 ‘돌싸움’에 끼어들어 살인 저지른 미국인

돌싸움. 1880년대 이 ‘놀이’를 본 알렌은 “군인들이 보았다면, 이렇게 격렬하게 싸우는 주민들이 아주 훌륭한 군사훈련을 한다고 생각할 정도”라고 기록했다. (『사진으로 보는 서울 백년』)
1903년 2월 5일(음력 1월 8일), 언제나처럼 정월 대보름을 앞두고 서울 만리재에서 ‘전통 민속놀이’인 돌싸움이 벌어졌다. ‘선수’들만 9000명을 헤아렸고 구경꾼은 수만 명에 달했다. 살이 터지고 피가 튀는 격렬한 싸움 와중에, 돌 하나가 구경차 나와 있던 운산금광의 미국인 직원 클레어 헤스(Clare W. Hess)의 발 밑에 떨어졌다.



“경기자들의 표적이 되었다고 생각했는지, 단순히 대담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자기 앞에 떨어진 돌을 군중에게 되던졌다. 한 가엾은 사람이 죽었다. 그 자리에 있던 서양인은 6명을 넘지 않았다. 모두의 뇌리를 스친 첫 번째 생각은 격분한 군중이 자신들을 죽이려고 달려들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한국인들에게는 그 미국인에게는 없던 선의(善意)가 있었다. 약간의 고함과 항의, 위협이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이탈리아 외교관 카를로 로제티의 기록이다.



현대의 스포츠가 대개 그렇듯이 ‘돌싸움(石戰)’도 고대의 군사훈련에서 비롯되었다. 삼국시대에도 돌을 주무기로 삼은 부대가 있었고, 고려 시대에는 아예 석투군(石投軍)이라는 정규 부대가 편성되었다. 마을 언덕 위에 빠짐없이 자리했던 서낭당의 돌탑은 무기 저장소였다. 그러니 ‘돌싸움’은 일종의 예비군 훈련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해마다 돌싸움 탓에 수많은 사람이 크게 다치고 적지 않은 사람이 죽었지만, 가족들도 하늘을 원망할 뿐 사람을 탓하지는 않았다.



‘민속놀이’가 된 돌싸움에는 ‘점복(占卜)’의 의미가 따라붙었다. 서울의 경우 동대문·서대문·남대문 밖 사람들이 한 패가 되고, 애오개·용산·마포 사람들이 다른 한 패가 되어 맞붙었는데, 삼문 밖 패가 이기면 경기에 풍년이 들고, 애오개 패가 이기면 전국에 풍년이 든다는 속설이 있었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따로 종각 주변과 청계천 일대에서 돌싸움을 벌이곤 했다.



해마다 이로 인한 인명 피해가 적지 않았던 탓에 정부도 여러 차례 금령을 내렸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1912년 3월 조선총독부는 오늘날의 경범죄처벌법에 해당하는 ‘경찰범 처벌규칙’을 제정하여 ‘돌싸움을 하거나 시키는 자’를 강력히 처벌하기 시작했고, 돌싸움은 곧 자취를 감추었다. 근대는 성(性)과 죽음, 폭력을 책과 스크린, 영안실과 경기장 안에 봉인한 시대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이 땅에서 공공연한 폭력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렇지만 육체적 폭력이 줄어든 만큼 심리적 폭력이 정교해진 건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전우용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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