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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원전

스탈린과 마오쩌둥(毛澤東)만큼 극명하게 사랑과 미움이 교차한 사이도 드물다. 시작은 의심이었다. 국공(國共)내전 때 스탈린의 지원은 미지근했다. 창장(長江) 횡단도 막으려 했다. 통일 대국 출현이 싫었는지 모른다. 마오는 스탈린이 진정 사회주의 동지인가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승리를 앞둔 1949년 6월 마오는 돌연 ‘일변도(一邊倒)’ 외교 정책을 발표했다. 소련에 ‘올인’하겠다는 선언이다. 미국은 그만큼 두려운 존재였다.



마오는 신중국 성립 직후인 1949년 12월 모스크바로 달려갔다. 스탈린에 대한 사랑의 시작이다. 여정 중 류사오치(劉少奇)에게 보낸 전보에서 “스탈린 대원수를 알현하다니 정의(情意)가 간절해지는구료”라며 그는 감격했다. 이때 스탈린은 또 한번 배신한다. 역 마중은커녕 제대로 된 대화 한번 응하지 않았다. 그러곤 마오를 2개월간 방치한다. 마오는 훗날 “먹고, 싸고, 자기만 했다”고 회고했다. 마오를 수행했던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도 “(스탈린이)마오 주석을 냉대했다”고 증언했다. 스탈린은 막판에야 저우를 크렘린으로 불러 중·소 우호조약을 체결했다. 스탈린에 대한 마오의 혐오는 극에 달한다.



그러나 1956년 마오의 마음은 회전한다. 소련공산당 제20차 당대회에서 흐루쇼프가 스탈린을 비판했기 때문이다. 마오는 “스탈린을 아버지라고 불렀던 자가 그가 죽자마자 시신에 채찍질한다”며 흐루쇼프를 ‘양면파(兩面派-두 얼굴의 사나이)’라고 경멸한다. 중·소 관계는 급랭했다. 흐루쇼프는 중국 내 소련 전문가를 전원 철수시켰다. 원자탄 제조를 지원한다는 약속도 까마귀 밥이 됐다. 마오는 이를 간다. 그러곤 1958년 원자탄 독자 제조를 발표했다. 6년 뒤 핵물리학자 덩자셴(鄧稼先) 박사의 손을 빌려 마오의 오랜 한(恨)은 풀린다. 그래도 마오의 소련 혐오는 죽을 때까지 가시지 않았다.



중국이 백두산 인근에 원전을 건설한다. 원전은 핵무기는 아니지만, 같은 핵물질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민감한 시설이다. 핵무기는 절대 안 된다며 북한을 억눌러온 중국이다. 북한 코앞에, 그것도 남북한 모두 성산(聖山)으로 여기는 백두산 인근에 원전을 세우면 북한을 자극할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했을까. 혹 ‘넌 안 돼도 난 할 수 있다’는 강국의 오만인가. 강국 소련의 배신과 구박으로 오랜 가슴앓이를 해야 했던 마오의 아픔을 중국인들은 벌써 잊은 듯하다.



진세근 탐사 2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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