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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뒤흔든 ‘두려움 없는 사랑’

드라마 ‘여인천하’ 속 윤원형(이덕화)과 정난정(강수연). 사진 SBS 제공
1563년(명종 18년) 음력 1월, 아직 찬바람이 가시지 않은 한양의 어느 대갓집. 법규에 따라 왕궁이 아닌 여염집은 99칸을 넘지 못하게 되어 있었지만, 이 저택만큼은 주변의 집들을 사들이고 이어붙여 실제 수백 칸이 넘었다. 그처럼 보란 듯이 세도를 부리며 살아도 괜찮았던 사람은 조선왕조 500년사에서도 이 집의 주인, 윤원형밖에 없었다.

지금 그 윤원형의 집은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마냥 흥청대던 것과 달리 왠지 엄숙한 분위기가 흘렀다. 종종걸음을 치는 하인들도 목소리를 죽이고, 향 내음이 자욱한 속에 이따금 독경 소리가 정적을 깨뜨리곤 했다.
그런 가운데 한 여인이 꽃가마를 타고(가마도 본래 여염집 안에서는 쓸 수 없었다) 먼 별채에서 와서, 대청 앞에 내렸다. 그리고 왕비처럼 화려하게 꾸민 옷자락을 너울대며 마루로 올라 굳게 닫혀 있던 문을 가만히 두드렸다. 잠시 뒤 문이 열렸다.

“부인, 오늘도 오시었소? 허허, 이리 자주 드나드시면 천지신명께 빌기 위해 여기를 애써 정갈하게 꾸민 효험이 없지 않겠소?”
그렇게 말해도 윤원형의 눈과 입은 웃고 있었다. 정난정도 고혹적인 웃음을 지으며 윤원형 앞에 살포시 앉았다. 비단 치마가 방바닥에 퍼지며 값진 사향 향내가 방안을 진동했다.

“천지신명께 비는 일도 중요하겠습니다만, 대감이 어찌 소첩을 멀리 하시리까? 소첩과 대감은 하나로 이어진 혼이요, 한 뿌리에서 피어난 꽃과 잎인 것을, 어찌 오래 떨어져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하···. 그도 그렇소. 부인! 자···. 이리 오시오. 나도 적적했다오.”
눈을 가늘게 뜨며, 윤원형은 정난정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금빛 찬란한 신상과 제기가 들어차고, 요란한 글씨가 적힌 방이 더덕더덕 나붙은 사랑방은 야릇한 열기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윤원형은 조선 전기 ‘훈척정치’의 궁극을 보여준 사람이었다. 중종의 계비로 자신의 누이인 문정왕후가 간택되고, 윤임·김안로 등과의 처절한 싸움을 거쳐 조카에 해당되는 명종이 보위에 앉은 다음부터 그의 권세는 나는 새 정도가 아니라 달과 별조차 떨어뜨릴 정도로 어마어마해졌다.

고위직에서 미관말직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사행정이 그의 손에서 이루어졌고, 바리바리 싸들고 오는 뇌물을 주체할 수가 없어 집 앞에 시장판을 벌여놓고 팔았다고 한다. 지방에서도 긁어모은 뇌물을 실은 ‘뇌물 배’가 정기적으로 4대 강을 거슬러 올라 한양의 윤원형 집까지 이르렀고, 중국에 가는 사신들도 반드시 윤원형이 맡긴 물자를 불법 거래하는 역할을 맡는 등, 윤원형의 부패는 보통의 부패 차원을 넘어 국가의 기능을 사적으로 전용할 정도까지 되어 있었다.
그토록 세도가 대단한 만큼 반발과 시기도 클 수밖에 없었다. 윤원형은 온갖 방법을 써서 불만을 단속했지만, 말과 행동은 단속해도 마음마저 단속할 수는 없는 법. 그의 마음에는 늘 한 조각 불안이 있었다.

그러다가 명종 18년에 이르러 마침내 공식적으로도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인 영의정에 오르자, “수상의 자리에 오르면 곧 화가 닥칠 것”이라던 점쟁이의 말까지 떠올라 흥겨운 가운데 더욱 불안했다. 그래서 그의 집 대청을 신을 받드는 장소로 꾸미고 치성을 드렸다. 치성을 드리는 동안에는 그 누구도 출입하지 못하게 했으나, 정난정만은 수시로 드나들며 음란한 일을 거듭했다고 『조선왕조실록』에 적혀 있다.

윤원형과 정난정이 언제 어떻게 만났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녀의 아버지는 정윤겸. 중종반정에 참여했던 공신의 한 사람으로 제법 세력이 있는 양반이었다. 그러나 정난정은 그의 정실부인 소생이 아니고, 첩의 소생조차 아닌 관비의 몸에서 난 여식이었다. 당연히 정윤겸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을 리가 없고, 그녀 또한 기생이 되어 술자리에서 웃음을 파는 처지가 되었다. 명문 파평윤씨 집안의 귀공자였던 윤원형과 그녀의 첫 만남도 그런 술자리였을 것이며, 그 자리에 동석했던 누구도, 아마 그 두 사람조차 정난정이 장차 윤원형의 짝이 되어 정경부인까지 오르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난정은 윤원형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으며, 그의 첩으로 윤씨 가문의 별당에 살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정실의 자리까지 차지해 버렸다. 조강지처를 버리고 첩을 정실로 올리는 일은 조선시대에 일반 평민도 쉽게 하지 못할 일이었는데, 하물며 파평윤문에서 그런 일을 벌이고야 말았으니, 자기 신분에 대한 정난정의 한과 그녀를 향한 윤원형의 애정이 얼마나 절절했는지 짐작할 만하다. 쫓겨난 윤원형의 전처는 얼마 후 세상을 떠나는데, 정난정이 독살했다는 소문이 돌았으나 사실이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아무튼 이 두 사람이 세상의 눈을 신경쓰지 않고 자신들의 사랑을 불태웠음은 분명하다.

윤원형은 사랑하는 여인에게 정실부인 자리 말고도 많은 것을 주고 싶었다. 그래서 명종 8년에 ‘서얼허통법’을 통과시켜 관직 등용을 비롯한 여러 부문에서 첩의 자식들이 차별을 받지 못하도록 했다. 이는 당시 조선 양반사회의 질서를 정면으로 뒤흔드는 것이었기에 윤원형의 세도에도 불구하고 반발이 거셌지만, 윤원형은 끝까지 밀어붙였다. 정난정은 편법으로 정실로 만들었지만, 그녀가 낳은 자식들은 서출이라며 은연중 천대받을지 모른다. 그래서 아예 법을 바꾸어 자신이 죽은 후에도 정난정의 자식들이 세상을 떳떳이 살게 해 주자는 배려였다. 어쩌면 본래 청렴한 선비로 이름났던 윤원형이 황금충처럼 변신한 것도, 그녀를 더 즐겁게 해주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하지만 그런 사랑을 세상은 이해해 주지 않았다. 아니, 이해하려 해도 그들만의 행복을 누리고자 남에게 끼친 해악이 너무 컸다. 문정왕후가 승하하기 무섭게 입도 벙긋 못하던 대소 신료들이 일제히 윤원형의 비리를 들춰내고 악행을 고발했다. 결국 벼슬자리에서 물러나 집에 틀어박혔지만 일반 백성들도 두 사람을 편히 살게 두지 않았다. 매일같이 돌과 화살이 날아들었다. 마침내 노비 몇 명만 데리고 외진 산골까지 도망가 살았으나, 그들을 잡으려 한양에서 금부도사가 내려왔다는 말에(오해였지만) 정난정은 독약을 삼키고 만다. 그녀의 시신을 붙잡고 오열하던 윤원형은 얼마 후 자신도 목숨을 버렸다.

여기서 두 사람의 사랑의 진정성을 엿볼 수 있다. 이른바 ‘팜므 파탈’에게 홀려 패가망신하거나 나라를 잃었다는 이야기는 많다. 그러나 그런 남자들 중 누구도 여인을 따라 목숨을 버리지는 않았다. 양녕대군은 애첩 어리의 자살 후 편안히 살았고, 당 현종은 혼자 살아남기 위해 양귀비의 자살을 강요했다. 그러나 부와 권력을 잃었을 때가 아니라, 연인의 죽음을 맞았을 때 삶의 미련을 떨쳐버린 윤원형이야말로 조선의 권력자 중 가장 절실한 사랑을 한 남자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사랑은 너무 많은 사람을 불편하게 했고, 나아가 역사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윤원형에게 넌더리가 난 임금과 사대부들은 오랜 훈척정치를 마감하고 철저하게 성리학적 원칙주의에 입각한 정치를 지향한다. 그렇게 호쾌함보다는 반듯함을, 화려함보다는 소박함을, 부국강병보다는 도덕성을 내세우는 시대가 열린다. 현실을 넘어선 이상을 추구하는 시대. 어쩌면 위선의 시대. 그 시대가 열리게끔 한 것은 사람도 신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두 남녀의 발칙한 사랑이었다.


성균관대 정치학 박사로 현재 성균관대 부설 국가경영전략연구소 연구원으로 있다. 『정약용 정치사상의 재조명』『왕의 투쟁』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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