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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오늘] 경제성장의 상징, 경부고속도로 기공식 열리다

1970년 7월 개통된 경부고속도로에서 여성 조사원들이 교통량을 기록하고 있다(『대한민국 정부기록 사진집』 제8권).
1968년 2월 1일 경부고속도로의 역사적인 기공식이 있었다. 67년 12월 13일 임시 국무회의를 통해 추진위원회가 조직된 지 채 두 달이 되지 않았고 전체 설계도도 나오지 않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추진위원장을 맡으려고 했을 정도로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되는 시점에서 반대 여론이 적지 않았다. 당시 한국의 1년 국민총생산(GNP)이 68억 달러인 상황에서 공사비가 500억원에 달하는 고속도로를 건설한다는 데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으며, 당시 한국에 있었던 버스의 수가 1만3000여 대였는데, 이 중 시속 80㎞ 내지 100㎞로 달릴 수 있는 버스는 50여 대에 불과했다.



따라서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공사비를 최소화하면서 효율적으로 이루어져야 했다. 이로 인해 원래 24m로 계획되었던 도로 폭이 22.4m로 축소되었으며, 중앙선을 비롯한 안전시설의 미비, 그리고 기층과 표층을 합쳐 아스팔트가 섞인 층의 두께가 일반 고속도로의 20㎝의 반에도 미치지 않는 7.5㎝로 건설되었다. 중앙선 문제는 이후 경부고속도로상에서의 중앙선 침범 정면 충돌사고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공사기간 단축은 또 다른 문제가 되었다. 추풍령 휴게소의 기념비에도 적혀 있듯이 경부고속도로는 전체 428㎞의 총연장을 감안할 때 세계 역사상 가장 빠른 시간 내에 건설된 고속도로였다. 그러나 71년으로 되어 있었던 완공 예정은 70년으로 앞당겨졌고, 이는 다시 69년 말로 당겨졌다. 결국 70년 7월 7일에 완공되었지만, 공기를 앞당기는 과정에서 77명이 희생되었다. 아울러 개통 이후 덧씌우기 작업으로 인해 경부고속도로의 부실 시공 논란이 계속되었다. 한 국회의원은 “경부고속도로가 누워 있으니 망정이지 서 있었다면 벌써 와우아파트처럼 무너지고 말았을 것”이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다양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경부고속도로가 한국 경제성장 과정에서 했던 역할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경부고속도로는 그 자체로서 한국 경제성장의 상징이 되었다. 경부고속도로를 통해 당시 위정자들의 미래를 내다본 정책을 짐작할 수 있다. 금강휴게소에 위치한 위령비로 공사과정에서 희생된 이들에 대한 배려도 느낄 수 있다.



지금도 몇몇 국책사업이 사회적인 논란 속에서도 국가의 미래라는 명분 위에서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사업들의 결과를 예측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효율성과 명분만 앞세우지 말고 크든 작든 후유증이 유발되지 않도록 신중하게 추진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교수·한국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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