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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홍의 소프트파워] 종묘(宗廟), 거대한 뿌리 - 대한민국 르네상스 ④

# 며칠 전 꿈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나타나 꽁꽁 언 논 위의 두꺼운 얼음을 깨내고 논바닥에 채 얼지 않은 고인 물을 말끔히 비워내셨다. 때마침 나는 5년여 동안 계속해왔던 인문학 강좌를 그만하기로 마음먹은 터라 그 꿈이 범상치 않게 다가왔다. 내겐 그것이 “깨고, 비우고, 바꾸라!”는 어머니의 혼(魂)의 가르침으로 여겨졌다.

# 사람에게 있어 하늘적 부분을 혼이라 하고, 땅적인 부분을 백(魄)이라 한다. 생명이란 혼백이 어우러진 상태이고 혼과 백이 분리되면 곧 죽음의 상태다. 죽으면 혼은 하늘로 돌아가고 백은 땅으로 스며든다. 백의 자리가 무덤이며 혼을 기려 신위를 모신 곳이 사당이다.

# 서울 종로구 훈정동에 있는 종묘는 조선왕조 역대 및 추존(追尊)된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왕가의 유교 사당이다. 종묘의 조영(造營)은 조선왕조가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1394년(태조 3년) 12월에 궁궐의 동쪽에 영건(營建)을 시작해 다음해 9월 1차 완공됐다. 궁궐의 서쪽에는 국토의 신(社)과 곡식의 신(稷)을 함께 이르는 사직(社稷)을 뒀다. 종묘는 사직과 더불어 국가의 근간이었다. 종묘의 조영은 1546년(명종 1년)까지 계속됐으나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소실됐다가 1608년(광해군 즉위년) 중건돼 오늘에 이르렀다.

# 종묘의 중심은 정전이다. 1395년(태조 4년) 5신실로 구성된 정전의 1차 완공 직후 태조의 4대 추존조인 목조·익조·도조·환조의 신위를 모셨다. 당시 천자의 나라인 중국의 종묘는 7신실이었고 제후의 나라인 조선은 5신실만 짓도록 규정돼 있었다. 그런데 태조가 승하한 후 나머지 1신실을 차지하자 2대 정종부터는 신위를 모실 곳이 없었다. 이에 조정에서 의논 끝에 1421년(세종 3년) 영녕전을 세워 정종의 신위를 모시고 4대 추존조의 신위도 옮겨 신실의 부족 문제를 해결했다. 그 후 우리의 종묘는 중국의 제도에 속박됨 없이 신실을 계속 늘려가 현재 정전 19신실에 19분의 왕과 30분의 왕후를, 영녕전 16신실에 15분의 왕과 17분의 왕후 및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 이은(李垠) 부부의 신위를 모시고 있다. 이렇게 면면한 뿌리를 계속 이어간 종묘는 세상에 다시 없다.

# 물론 보이는 건물이 종묘의 전부는 결코 아니다. 조선시대의 최상급 국가제례로서 역사적인 보존가치가 높은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도 있다. 특히 종묘제례악은 기악·노래·춤으로 구성되는데, 세종 때 궁중희례연에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졌던 보태평(保太平)과 정대업(定大業)에 1464년(세조10년) 제례에 필요한 악곡이 첨가된 것이다. 보태평은 역대 왕의 문덕을, 정대업은 무덕을 찬양하는 음악이다.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은 전통 유교의례의 진수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역사문화 콘텐트로서의 가치도 뛰어나다.

# 종묘는 사적 제125호로 지정·보존돼 있으며, 정전은 국보 제227호, 영녕전은 보물 제821호, 종묘제례악와 종묘제례는 각각 중요 무형 문화재 제1호와 제56호로 지정돼 있다. 종묘는 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고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 역시 유네스코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선정됐다. 하지만 종묘의 진정한 가치는 그것이 담고 있는 정신에 있다. 다름아닌 ‘뿌리의 지속, 흔들림없는 위엄, 그리고 축적된 미래에 대한 확집’이 그것이다.

# 종묘는 지나간 과거만을 품고 있는 슬픈 초상이 아니라 다가올 미래를 비춰볼 수 있는 우리의 거울이다. 종묘는 흘러간 왕조의 흔적이 아니라 우리 혼의 옹골찬 응집이다. 얼음장을 깨고 논물을 비워낸 내 어머니의 혼처럼 종묘의 혼은 우리에게 새롭고 엄정한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대한민국 르네상스가 그것이며 종묘를 다시 봐야 할 이유가 여기 있다.

정진홍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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