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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아, 스무살의 자서전 <상> “여덟 살 때, 내가 가장 즐겼던 건 동계 올림픽 놀이”

부실한 스케이트 덕에 발목 힘 단련

만 나이로 다섯 살 때 엄마, 아빠, 언니와 함께 과천 실내 스케이트장을 찾은 나는 처음 스케이트를 신었다. 얼음판을 처음 딛자마자 미끄덩, 넘어질까 봐 조마조마한 마음에 심장이 마구 두근거렸다. 떨리는 마음이 차차 사라지자 스케이트장은 새로운 세상이 됐다. 처음 피겨스케이트를 접했던 그해 여름, 엄마는 과천 아이스링크에서 방학 중에 피겨스케이팅 특강 접수 신청을 해주셨다. 짧은 강습 기간 때문에 대부분의 아이들은 스케이트화를 대여해 신었지만, 나는 나만의 스케이트화를 갖고 있었다. 노란 끈이 묶인 빨간 부츠. 고모한테 받은 건데, 이웃에서 버리려고 하는 것을 나한테 맞겠다며 가져다 주신 것이다.

나의 첫 스케이트화는 종잇장같이 얇고 부드러워서 그냥 발을 감싸는 가죽 정도에 불과했다. 선수용 스케이트화는 발목 보호를 위해 단단하게 만들어진다. 덕분에 발이 아프지는 않았지만 발목을 지지해주지 못했기 때문에 오직 내 힘으로 버텨내며 스케이팅을 해야 했다. 엄마는 가끔 부실한 첫 스케이트화가 나를 일찌감치 큰 재목으로 단련시킨 게 아니냐며 우스갯소리를 하신다.



[1] 2008년 서울 올림픽공원 컨벤션센터 팬미팅에 참석한 연아. [2] 발레를 배우고 있는 초등학생 연아. 스케이트보다 재미없고 지루해 연아는 시큰둥해했다. [3] 유치원 학예회 때. 부채춤을 추기 위해 한복을 입고 무대에 올랐다. [4] 언니(오른쪽)과 함께 있는 연아. 어릴 때는 언니가 가장 좋은 친구였다. [중앙출판사 제공]

“연아 밀어주실 형편 되십니까”

“연아는 아기 때 걸음마도 빠르더니 스케이트도 잘 타는구나.”

나는 8개월째부터 걸음마를 시작했다. 다른 아기들은 보통 첫돌 즈음에 걸음마를 시작한다고 한다. 가끔 집안 어른들이 모이면, 그때부터 내 운동신경이 남달랐다며 재미 삼아 말씀하시곤 한다.

피겨스케이팅 특강 프로그램이 끝나자 엄마는 언니와 나를 마스터반에 다시 등록해 주셨다. 마스터반이 끝나갈 무렵, 나를 지도해 주시던 류종현 코치님께서 갑자기 엄마를 뵙자고 하셨다. “연아가 피겨에 재능이 있습니다.” 그리고 코치님은 이 말씀도 하셨다. “어머님, 피겨는 돈이 많이 들어가는 운동입니다. 아이를 밀어주실 형편이 되십니까?” 엄마는 어려운 결정을 내리셨다. 언니는 마스터반을 끝으로 피겨를 그만두었고, 나는 본격적인 선수로서의 길을 가기 위해 개인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알라딘과 미셸 콴, 내 꿈의 시작

‘스케이터’라는 존재가 처음으로 가슴속에 들어온 날은 초등학교 1학년 때 아이스쇼 ‘알라딘’을 본 날이다. 화려한 코스튬과 우아한 동작, 아름다운 음악,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황홀한 모습이었다. 그 동작 하나하나를 눈으로 쫓느라 내용은 전혀 기억에도 없었다.

내가 피겨 선수의 길을 가기로 한 다음 해에 1998 나가노 동계 올림픽이 열렸다. 나는 그때 내 꿈의 실체를 발견했다. 당시 은메달을 딴 미셸 콴. 막연하게 스케이트 선수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내게 닮고 싶은 사람이 생긴 것이다. 당시 내가 가장 즐겼던 놀이는 ‘동계 올림픽 놀이’였다. 각자 좋아하는 선수가 돼 피겨 경기를 하는 놀이였다. 나는 항상 ‘미셸 콴’이 되어 그동안 갈고 닦은 동작과 표정 연기를 따라 하곤 했다.



내게도 사춘기 … 무엇보다 외로웠다

초등학교 6학년, 나에게도 사춘기가 찾아왔다. 눈 뜨자마자 연습 갈 준비, 쉬었다 연습, 또 연습. ‘운동하는 로봇’이 된 것 같았다. 미쳐 버리는 건 아닌가 싶을 때도 있었고, 무엇보다 외로웠다. 사춘기 시절 누구나 생각하는 ‘자살’이라는 것도 가끔 떠올려봤지만 그건 진짜 단어뿐이었다. 솔직히 무서워서 죽기는 싫었다. 난 살고 싶어~.

그러다 결국 문제가 터졌다, 첫 부상. 2003년 2월 동계체전을 앞두고 무리한 연습으로 발목 인대가 늘어났다. 걷기도 힘들 만큼 아팠던 나는 “피겨를 그만두겠다”고 했다. 게다가 당시는 IMF로 아빠 회사가 어려워져 더 이상 피겨를 하기 힘든 상황이기도 했다. 당시 나를 지도하던 김세열 코치님은 펄쩍 뛰다가 “전국체전만이라도 나가자”고 하셨다. 마지막이라니 몸이 가벼워서였을까. 나는 나조차 믿을 수 없을 만큼 트리플 5종 점프를 완벽하게 뛴 뒤 1위를 차지했다. 이렇게 끝인가. 스케이트를 안 타도 되니 좋기만 할 줄 알았는데.

 정리=온누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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