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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오늘] 레닌 사망 … 신학생 출신 스탈린이 우상화 작업 주도

1923년 뇌졸중으로 세 번째 쓰러진 레닌(1870~1924)은 휠체어에 의존해야했고, 의사와 간호사 40명으로 이루어진 의료팀이 그를 돌봤다. 신경외과전문의(오른쪽)가 뒤에 서 있고, 레닌이 가장 좋아한 여동생 마리아 울리야노바가 레닌 쪽으로 몸을 굽히고 있다. 레닌의 정원사가 찍은 사진이다.
1917년 11월 러시아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레닌은 그로부터 4년 반쯤 지난 1922년 5월 25일 뇌졸중으로 쓰러졌다가 곧 회복됐다. 하지만 그해 가을 두 번째 뇌졸중이 일어났고, 이듬해인 1923년 3월 세 번째 쓰러진 후 반신불수가 되어 휠체어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모스크바에서 남쪽으로 약 30㎞ 떨어진 고리키라는 마을에서 요양을 하다 1924년 1월 21일 54세의 나이로 집권 6년3개월 만에 죽었다.

1922년 레닌은 모든 혁명 동지들의 결점을 언급한 일련의 짧은 글을 구술해 자신의 사후 공개하도록 했다. ‘레닌의 유언’으로 알려진 간략한 이 기록에서 레닌은 후계자가 되려는 야심을 품고 있는 지도자로 스탈린과 트로츠키를 지목하고 두 사람 사이의 권력투쟁으로 당이 분열될지 모른다고 경고했다. 레닌은 특히 스탈린이 당 총서기로 선출된 뒤 지위를 이용해 자기 수중에 무한대의 권력을 집중시키고 있다고 경고했다. 이 자리는 정치적 자리라기보다 당의 사무를 총괄하는 실무적 자리인데도 그 본래의 뜻을 버리고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꾸짖었다. 그는 이어 ‘무례하기 짝이 없는’ 스탈린을 총서기직에서 해임해야 한다고 제의했다.

레닌은 편지 형식으로 쓴 이 문서의 복사본을 몇 부 만든 뒤 각각 밀봉하고 ‘비밀. 오직 레닌만이, 그리고 레닌 사후에는 레닌의 아내 나데즈다 크루프스카야만이 개봉할 수 있음’이라고 썼다. 그러나 이 편지는 곧바로 스탈린의 손에 들어갔다. 경호원과 간호사들이 ‘빨대’였다. 레닌의 속셈을 정확히 파악한 스탈린은 권력 투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했고, 레닌이 죽자 장례위원회를 이끌어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다질 수 있었다.

때마침 레닌이 죽기 2년 전 이집트에서는 투탕카멘의 미라가 발굴돼 전 세계적인 관심을 모으고 있었다. 그루지야 신학교 출신의 사제 지망생이었던 스탈린은 소련에 종교적 이미지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스탈린은 레닌을 미라로 만들어 붉은 광장에 세울 영묘(靈廟)에 영구히 전시하기로 결정했다. 레닌의 아내 크루프스카야가 유사종교적 행위에 반대했지만 소용없었다.

스탈린은 모든 반대를 무릅쓰고 볼셰비즘의 창시자를 영묘에 모시기로 했다. 페트로그라드는 레닌그라드로 이름을 바꿨다. 레닌 동상이 곳곳에 세워졌다. 종교를 공산주의가 대신하자 레닌이 새로운 예수 그리스도로 등장했고, 스탈린은 레닌 숭배의 제사장을 자임했다. 소련 공산독재는 20세기를 못 넘겼건만, 북녘 땅에서는 김일성 신격화에 이어 지금도 3대째 권력세습이 진행되고 있으니 딱한 노릇이다.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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