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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영의 시시각각] 객관식 시험의 정치학

“정치가 모든 것은 아니지만 모든 것은 정치적이다”라는 말처럼 모든 사회 현상에는 정치가 자리 잡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교육, 특히 시험만큼 ‘정치적’인 문제는 없다. 20일 서울시 교육청은 이번 1학기부터 초·중·고 내신 시험에서 서술형 문제의 비중을 높인다고 발표했다. 교육청이 밝히는 이유는 “창의력 있는 인재를 키우려면 시험이 바뀌어야 한다”라는 것이다.

은연중에 객관식 시험, 특히 선다형시험(選多型試驗, multiple-choice test)은 창의성을 죽이는 암기 위주 교육의 주범으로 몰리고 있다. 그래서 선다형시험의 많은 장점이 과소평가되고 있다. 선다형시험은 상대적으로 저렴한 비용으로 실시할 수 있으며 채점자 간 이견의 여지가 없다. 공정성 시비 가능성이나 교사의 채점 부담도 덜하다. 신속하게 결과를 알 수 있으며 표준화된 선다형시험의 경우 다른 시점, 다른 학교·지역의 시험 결과와 비교도 용이하다.

선다형시험은 국내·국제 정치와도 연결돼 있다. 우선 선다형시험은 민주주의와 친연성(affinity)이 있는 시험이다. 민주주의는 선택이다. 선다형시험은 선택을 훈련시키는 시험이다. 우리는 선다형시험에서 (1)·(2)·(3)·(4) 중 하나를 선택하듯 투표소에서 기호1·2·3·4…번의 후보 중에서 한 명을 선택한다.

역사를 봐도 민주주의와 선다형시험의 관계가 드러난다. 선다형시험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곳은 ‘세계 민주주의의 리더’ 역할을 자임해 온 초강대국 미국이다. 미국에서 선다형시험의 확산에 기여한 사람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모병(募兵)에 필요한 선다형시험을 개발한 에드워드 손다이크(1874~1949)다. 컬럼비아대 교수였던 손다이크는 근대 교육심리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손다이크와 선다형시험은 진보·과학·개혁을 표방하며 1930~40년대에 미 교육계를 장악한 진보교육운동에서 큰 물줄기를 이뤘다.

선다형시험은 대중·평등 시대에 필요한 평가 도구를 제공했다. 소수만이 교육받는 시대엔 선다형 같은 시험은 필요 없었다. 소크라테스 시대에는 스승과 대화하는 게 시험이었다. 유럽에서 오랜 구두시험의 전통을 깨고 최초의 필기 시험을 등장시킨 것은 1792년 케임브리지대학이다. 1926년 도입된 미국 대학수학능력시험(SAT)을 비롯해 선다형시험은 출신·인종·신분이 아니라 학습 능력만 따지는 교육 제도의 발전에 기여했다.

오늘날에도 선다형시험은 미국에서 가장 애용되는 시험이다. 매년 5억 개의 선다형시험 문제지가 소비된다. 선다형시험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은 것은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이 주도한 아동낙오방지법(No Child Left Behind ACT·2002)이다. 낙오방지법으로 전 미국의 학생·교사·학교가 선다형시험을 포함, 표준화된 시험으로 비교·평가된다. 1963년 이후 미 학생들의 SAT 점수가 떨어지고 다른 선진국에 비해 학력이 저하되고 있다는 게 낙오방지법의 배경이다.

낙오방지법 때문에 발생하는 역기능도 있다. 학생들의 시험 성적으로 교사·학교가 평가받기 때문에 ‘시험 중심으로 가르치는(teaching to the test)’ 현상이 빚어지고 있다. 선다형시험이 최신 교육 스탠더드와 거리가 있다는 지적도 미 교육계에서 지적돼 왔다. 그러나 초강대국 미국은 국가경쟁력을 유지하고 증진하는 중대 수단으로 시험을 구사할 것이다.

서술형 문항의 비중을 높이는 서울시 교육청의 이번 결정은 선다형시험은 비판적 인지 능력 측정, 창의성 제고 유도 등이 힘들다는 지적이 반영된 것이다. 교육경쟁력 증진에 도움이 될 것이다. 다만 객관식, 선다형시험의 장점도 계속 유지·발전돼야 한다.

해럴드 라스웰(Harold Lasswell)에 따르면 정치는 “누가 무엇을, 언제, 어떻게 갖느냐”를 결정한다. ‘시험의 정치학’은 ‘문장력이 우수한 학생’과 ‘글씨 잘 쓰는 학생’이 ‘높은 점수’를 받는 데 유리할 것이라는 점을 예고한다. ‘어떻게=사교육으로’라는 등식이 성립하지 않게 하기 위해 할 일이 많다.

김환영 중앙SUNDAY 지식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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