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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에 1000억 경제효과, 스포츠가 도시를 바꿨다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겨울 전지훈련 메카 서귀포 르포

폭설이 내린 다음날 서귀포 강창학경기장에서 단국대와 천안제일고가 연습경기를 하고 있다. 한라산은 흰눈을 덮어쓰고 있지만 경기장의 눈은 모두 녹아 파릇한 잔디가 드러났다. 서귀포=신동연 기자




제주 서귀포의 겨울은 적요했다. 관광객이 사라진 한라산 남녘에 빨간 동백꽃만 말없이 피었다 툭툭 떨어졌다.



감귤 수확마저 끝나 사람들은 하릴없이 시간을 보냈다. 어쩌다 서귀포를 들르는 관광객들도 천지연폭포와 외돌개를 쓱 둘러보고는 야속하게 제주시로 올라가 버렸다.



2010년 겨울, 서귀포는 활기가 넘치다 못해 뜨끈뜨끈하다. 스포츠가 도시를 탈바꿈시켰다. 서귀포가 ‘겨울 전지훈련의 메카’로 재탄생한 것이다.



요즘 서귀포 시내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차량은 전국에서 몰려온 축구단 수송 버스다. 서귀포시는 올겨울(2009년 11월∼2010년 3월) 20개 종목, 1500여 개 팀, 3만5000명의 전지훈련 유치 목표를 세웠다. 이들이 먹고, 자고, 씻고, 돌아다니는 데 쓰는 돈은 모두 서귀포에 뿌려진다.



서귀포시가 계산한 올겨울 전지훈련 유치 경제효과는 300억원이지만 이는 오로지 선수단의 숙식비용만 잡은 것이다. 실제는 이를 훨씬 웃돈다. 학교 팀의 경우 보통 선수 한 명당 두 명의 학부모와 관계자가 따라 온다. 이들은 선수들의 훈련을 참관하는 것 외에는 딱히 할 일이 없다. 그래서 밤에는 끼리끼리 어울려 술잔을 기울이고, 휴식일에는 렌터카를 빌려 관광과 골프를 하고, 감귤과 옥돔을 산다. 이런 것들을 모두 합치면 올겨울 전지훈련단이 서귀포에 뿌리고 갈 돈은 1000억원을 훌쩍 넘어선다는 계산이 나온다.



누가, 언제, 어떻게 서귀포에 ‘1000억원짜리 선물’을 안겨줬을까. 그 비밀을 찾아 제주행 비행기에 올랐다.



사용료 없어요. 감귤도 물도 맘껏 드세요



1월 13일 저녁 제주공항에 내렸다. 이날 제주도에는 엄청난 폭설이 쏟아졌다. 제주시에서 서귀포로 내려가는 도로들이 눈밭으로 변했다. 600번 리무진 공항버스도 가다가 멈춰 체인을 감아야 할 정도였다. ‘내일 취재와 사진 촬영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걱정 속에 잠을 청했다.



다음 날 말끔하게 날이 갰다. 프로축구단 울산 현대가 훈련하고 있는 시민구장을 찾았다. 거짓말처럼 눈이 녹아 파릇파릇한 잔디 구장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김호곤 울산 현대 감독은 “서귀포는 국내에서 날씨가 가장 따뜻하고 훈련 여건도 좋아 최근에는 프로 팀들도 자주 찾는다. 서귀포에서 보름 정도 훈련을 하면 해외 전지훈련 일정을 줄일 수 있어 경비 절감이 된다”고 말했다.



현재 서귀포에는 모두 14개의 축구장(천연잔디 5면, 인조잔디 9면)이 있다. 남원읍에 짓고 있는 전지훈련센터(축구장 3면)가 올해 완공되면 축구장은 17개로 늘어난다. 실내체육관은 중문동의 국민체력센터를 비롯해 5개가 있다. 테니스 코트는 17면이 있는데 그중 3개 면에는 지붕을 씌워 전천후 훈련이 가능하게 했다.



서귀포시는 이 모든 시설에 대해 사용료를 일절 받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전지훈련 선수단에는 싱싱한 감귤과 삼다수를 제공한다. 항공료는 최대 40%, 렌터카 비용은 50%까지 할인해 준다. 자체 버스가 없는 수영·육상 등 개인 종목 선수들을 위해서는 공항과 숙소를 오가는 셔틀버스도 운행한다.



훈련하다 다친 선수들을 위한 무료 진료 프로그램도 있다. 제주월드컵경기장 내 서귀포W스포츠클리닉에 가면 대한선수트레이너협회(KATA) 소속 자원봉사자들이 기다리고 있다. 이들은 레이저 치료기 등 첨단 장비를 갖추고 하루 200명 정도의 부상 선수들을 치료한다.



서귀포 국민체력센터 1층 체육관에서는 낙생고와 제물포고 농구 선수들이 경기를 하고 있었다. 전지훈련 중인 8개 남자 고교 농구 팀이 자체 리그를 벌이고 있다. 전지훈련 농구 담당인 장기동씨는 “이달 말에는 중앙대·연세대·고려대 등 대학 강호들이 모두 내려올 예정이고, 중국 프로팀도 2월 초에 오기로 돼 있다”고 말했다.



국민체력센터 지하 수영장은 길이 50m에 10개 레인을 갖추고 있다. 절반은 서귀포시민들이 이용하고, 절반은 선수들 몫이다. 서귀포시청 수영 감독인 윤지희씨는 “내려오고 싶다는 팀은 많은데 레인이 없어 더 받을 수 없다”고 귀띔했다.



서귀포시청 스포츠산업과 길봉현씨는 “요즘은 종목 구분 없이 무작정 밀고 내려와 ‘연습장을 배정해 달라’고 하는 팀들이 있어 골치가 아프다”고 말했다.



“서귀포를 전지훈련 메카로 만듭시다”



1999년 겨울 설동식(50)씨가 서귀포고(당시 서귀고) 축구 감독으로 부임했다. 충북 청주 출신으로 숭실고와 단국대에서 공격수로 뛴 그는 부상으로 일찍 운동을 접었다. 그리고 웨딩 앨범 사업을 해 돈을 좀 벌었다. 축구 선수 출신으로는 남다른 ‘비즈니스 감각’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따뜻하고 조용한 서귀포가 겨울 전지훈련의 최적지라는 판단을 했다. 그래서 중·고교 감독을 맡고 있는 축구 선후배에게 “서귀포로 전지훈련을 와라”고 권유했다. 당시는 서귀포에 천연잔디는 고사하고 인조잔디 구장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설 감독은 전지훈련 온 팀들을 정성껏 뒷바라지했고, 서서히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대표팀이 서귀포로 전지훈련을 왔다. 대표팀은 파라다이스호텔에 묵었는데 히딩크는 “전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환상적인 경관이다. 서귀포는 정말 멋진 곳이고 전지훈련의 최적지”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서귀포가 국제적으로 알려지면서 분위기가 확 달아올랐다. 강상주 당시 서귀포시장과 설 감독이 “서귀포를 축구 전지훈련의 메카로 만들자”며 의기투합했다.



강 시장은 특유의 추진력을 발휘했다. 바람이 덜 부는 아늑한 부지에 축구장이 속속 지어졌다. 강 시장은 외지인인 설 감독을 배척하지 않고 힘을 실어주었다. 서귀포 시민들도 눈에 띄게 겨울 경기가 좋아지자 적극 협조하기 시작했다. 조기축구 회원들은 “겨울엔 전지훈련 팀들에 양보하자”며 축구장을 내줬다.



이번 취재 기간에 서귀포에는 축구만 70개 팀이 넘게 머물고 있었다. 설 감독은 이 팀들의 훈련장 배정과 연습경기 일정을 꼼꼼히 체크한다. 숙소나 식당과 관련해 문제가 생기면 직접 나서 중재하고 해결한다. 설 감독의 휴대전화는 하루 종일 끊임없이 울린다. 매년 1, 2월 전지훈련 피크 때는 입술이 터질 정도로 피곤하지만 그는 ‘보람 있는 일’이라고 한다. 설 감독은 “시설이 더욱 좋아져 일본과 중국의 프로 팀을 유치하게 되면 한·중·일 윈터리그를 벌일 수 있다. 그때가 되면 비로소 서귀포가 아시아의 전지훈련 메카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 경쟁상대는 일본 규슈와 중국 쿤밍”



한 외지인의 예지와 헌신으로 서귀포는 변신의 계기를 맞았다. 하지만 이를 진전시키는 것은 지역민 모두의 몫이다. 그래서 서귀포시는 전지훈련단 유치사업 10년째를 맞는 올해를 ‘재도약의 해’로 선언했다.



시는 그동안의 공과를 면밀히 검토하고, 서귀포의 장점과 약점도 냉정하게 들여다봤다. 국내 전지훈련 경쟁 도시인 경남 남해, 전남 강진·목포, 강원도 태백 등지에 직원을 보내 취할 점과 버릴 점을 살폈다. 아시아의 경쟁 지역인 일본 규슈와 중국 쿤밍에도 가서 벤치마킹했다.



결론은 이랬다. ‘우리는 기후와 시설 등에서 다른 도시에 비해 우월하다. 하지만 경쟁 도시들이 인프라를 확충하고 저렴한 훈련경비를 앞세워 우리의 시장을 빠른 속도로 잠식하고 있다. 따라서 다목적 실내체육관, 육상·수영 등 기초종목 훈련 시설 등을 시급히 확충해 명실상부한 최고의 전지훈련지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서귀포시는 동계훈련 시즌인 11월부터 다음해 3월까지 스포츠산업과장을 팀장으로 하는 전담 TF팀을 가동한다. 올해는 7개 반 60명이 투입됐다. 이들은 환영격려반, 신종플루대책반 등 구체적으로 역할을 나눠 훈련단을 지원한다. 제주월드컵경기장 앞에 상황실도 상시 운영한다.



서귀포의 전지훈련 유치는 이제 매우 조직적으로 움직인다. 이들은 2006년 이후 매년 전국체전 참가팀을 대상으로 홍보활동을 전개하고, 지도자들을 상대로 맨투맨 유치작전을 벌인다. 전지훈련 기간에는 관내 사회단체나 마을별로 자매결연 팀을 정해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서귀포에서 전지훈련을 한 팀이 전국대회에서 입상하면 축전을 보내주는 ‘감성 애프터 서비스’도 놓치지 않는다.



이들의 노력에 중앙 정부도 상훈으로 격려했다. 행정안전부는 지난해 11월 25일 ‘대한민국을 빛낸 최고기록 공무원 94인’을 선정했는데 서귀포시 스포츠산업과 소석빈·오철종·길봉현 등 소속 직원 8명 전원이 수상했다. 이들은 ‘10년간 국내외 전지훈련단 8114팀 18만278명을 유치해 지역경제 파급효과 1455억원을 올린 공로’를 인정받았다.



제주도의회 강문철(제주시 외도-이호-도두동) 의원도 지방의회 우수의정활동사례 우수상에 선정돼 이달 28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상을 받는다. 강 의원은 ‘스포츠 전지훈련 유치 활성화 지원 조례’를 제정해 도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제주도의회 고광희 정책자문위원은 “제주도 내 전지훈련 지원 시스템을 유기적으로 연결해 신속하고 정확하게 훈련단의 요구를 맞춰줄 수 있도록 한 게 이 조례의 특징”이라고 말했다.



중앙일보는 2009년 11월 ‘스포츠가 도시 경쟁력이다’는 제목의 기획 기사를 연재했다. 스포츠를 통해 도시가 업그레이드된 현장을 기자들이 찾아갔다. 세인트앤드루스(스코틀랜드)는 골프의 성지로 우뚝 섰고, 레이크플래시드(미국)는 두 차례 겨울올림픽을 유치한 뒤 세계 최고의 겨울 스포츠 관광지로 거듭났다. 시카고(미국)는 마라톤 대회를 통해, 우라와(일본)는 프로축구팀 우라와 레즈 덕분에 짭짤한 재미를 보고 있다.



스포츠는 도시를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다. 그러나 전제가 필요하다. 시뻘건 레드오션에서 청포도 같은 블루오션을 찾아낼 수 있는 혜안, 지역 공무원의 헌신과 투자, 그리고 지역민들의 수고와 협조가 어우러져야 한다.



서귀포는 지금 전지훈련 중이다. 한라산 남녘의 동백꽃은 이제 외롭지 않다.



서귀포=정영재 기자 jerr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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