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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곳 보살핀 새뮤얼 무어, 백정들에겐 성자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새뮤얼 무어(왼쪽) 가족 사진.


미국 시카고의 매코믹신학교 출신인 새뮤얼 무어(1860∼1906:한국이름 모삼열)는 1882년 부인과 함께 제물포를 거쳐 서울에 입성했다. 날이 저물어 남대문에 다다르니 성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일행은 성벽에 로프를 걸고 성안으로 넘어들어 왔다. 그 후로 무어는 드높은 신분차별의 벽을 넘는 사역을 펼친다.



“우리는 천한 백정과 더 이상 예배를 드릴 수 없소이다. 당장 백정을 내보내시오.”

세례 받은 박성춘이 백정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양반들은 무어 목사를 압박했다.

“양반들만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모두 똑같습니다.”



소신이 분명했던 무어는 박성춘을 감쌌다.



“그럼 도리가 없군요. 우리가 떠나는 수밖에.”



지체 높은 양반들은 곧바로 교회를 떠나 다른 예배소를 차렸다. 교세가 미약했던 초창기 개척교회에서 절반 이상의 신도들이 떠나자 무어는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박성춘을 내보낼 수는 없었다. 곤당골교회 근처에는 작은 실개천이 흐르고 있었고 그 천변에 백정들과 머슴·행랑아범 등 하층민들이 살고 있었다. 무어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걸 자신의 소명으로 알았다.



노방전도(路傍傳道)를 기꺼이 선택한 무어는 월요일에 출발해 목요일에 돌아오곤 했다. 그는 한강변에 있는 마을들을 배타고 순행했는데 그가 타고 다니던 배를 ‘기쁜 소식’이라 이름 지었다. 그는 곤당골교회 말고도 마포의 동막교회와 서대문의 대현교회도 설립했다.



“나는 가장 낮은 계층에서 시작해 위로 올라가기를 원합니다.”



백정 전도를 하면서 뜨거운 감동을 받았던 그는 고종황제에게 편지를 올려서 말씀을 전하고자 했다. 하지만 제중원 의사 출신 외교관 알렌의 제지로 무산된다. 알렌은 미 국무부에 보낸 서신에서 “백정에서 황제라니 말이 되는가? 도약도 너무 지나친 도약이다”며 무어를 비판하고 있다.



박성춘의 아들 박서양은 한국인 최초의 양의사이자 교육가요, 독립 운동가였다. 한국 근대사의 상징적인 인물인 그는 아명이 봉출이었는데 무어가 세운 곤당골소학교에 다녔다. 제중원 원장 에비슨과 절친했던 무어는 백정의 아들 봉출이 의사가 되는 데 일조했다.



낮고 천한 자들과 즐거이 나누고 섬겼던 그는 길지 않은 생애 말년이 순탄치 못했다. 폐결핵에 걸린 아내의 치료를 위해 미국에 가있는 사이 선교사회는 홍문섯골교회를 폐쇄조치한다. 예전에 곤당골교회를 나간 양반들이 독자적으로 교회를 운영해온 일을 뒤늦게 문제 삼았던 것이다. 무어는 선교사회의 명령에 따랐다. 하지만 그는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평양신학교에서 강의했고 ‘그리스도 신문’ 사장직을 맡아 사역했다. 신병으로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한 무어는 1906년 12월 22일46세를 일기로 소천, 양화진 선교사 묘원에 잠들었다. 그를 따랐던 백정들은 무어를 성자(聖者)로 모시려 했다. 아쉽게도 그것은 개신교가 아닌 천주교의 관습이었다.



김종록 객원기자·작가 | 제150호 | 20100124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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