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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운산 수수밭서 격투 끝에 첫 중공군 포로 붙잡아”

1950년 10월 24일 평북 운산에서 중공군 포로 1호를 붙잡은 김대일씨. [신인섭 기자]
백선엽 예비역 대장의 회고록 ‘내가 겪은 6·25와 대한민국’이 연재되면서 전쟁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던 사람들의 증언이 잇따르고 있다. 이에 중앙일보는 전쟁을 겪었던 세대들의 다양한 경험담을 증언석 형식을 통해 싣기로 했다. 동족상잔의 비극적 속내를 기록으로 남겨 후세에 전하기 위해서다. 1950년 10월 24일 운산전투에서 첫 중공군 포로를 잡은 김대일씨의 증언을 먼저 싣는다. 첫 중공군 포로 를 잡은 경위가 구체적인 증언으로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6·25를 말한다 - 나의 증언석 낙동강서 입대한 학도병 1기 78세 김대일씨




경기도 고양에 살고 있는 6·25 참전용사 김대일(78·사진)씨는 1950년 10월 24일 평북 운산 전선에서 중공군 포로를 잡았다. 우리가 잡은 중공군 포로 1호다. 당시 백선엽 사단장이 이끌던 국군 1사단의 15연대(연대장 조재미 대령) 수색대로 최전방 정찰 임무를 수행하면서다. 이 때문에 중공군의 참전이 비로소 확인됐다. 그는 50년 7월 4일, 학도병 1기로 낙동강 전선에서 입대했다.



김씨는 “중앙일보에 연재되고 있는 백선엽 장군 회고록에서 운산전투 상황이 나오는 것을 보고 그 당시에 15연대 수색대가 세웠던 공로를 꼭 기록에 남기고 싶어 중앙일보에 연락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의 증언을 바탕으로 당시 상황을 되살려 본다.



“국군 15연대 수색대는 약 60명으로 짜여 있었다. 포로를 잡기 하루 전인 10월 23일 운산에서 머문 뒤 24일 아침 7시쯤 수색에 나섰다. 내 옆에는 박근영이라는 민간인이 함께 있었다. 그는 권투 선수 출신이다. 유명 가수 현인(작고)씨와 함께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활동했던 사람이다. 주먹 깨나 쓰던 사람이었는데, 권투를 할 때 받았던 충격으로 몸 상태가 그리 좋지는 않았다.



박근영씨는 서울에서 살다가 전쟁이 터진 뒤 북한 인민군에게 잡혀 평양까지 끌려갔다 탈출했다. 우리 부대가 평양에 입성했을 때 그를 만나게 됐다. 갈 곳이 없었던 박씨는 우리 연대를 따라다녔다. 전쟁 통이라 어수선한 분위기여서 그런 게 가능했다. 박씨는 상하이에서 살았기에 중국어를 할 줄 알았다. 그는 10월 하순 이후 수색대와 자주 동행했다. 운산 지역으로 북상하면서 “중공군이 참전했다”는 소문이 분분했기 때문이다. 수색대가 혹시 중공군을 발견할 경우 통역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를 앞세우고 다녔다.



수색대가 북쪽의 온정리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는데 조그만 다리가 보였다. 그곳을 건너 1㎞쯤 지났는데 이상한 기척이 났다. 길가에는 어른 키만 한 수수밭이 있었는데 바람이 불면서 수수가 한쪽으로 기울었다. 그 순간 앞에 섰던 누군가가 “적이다”라고 외쳤다. 박씨와 나는 수수밭 쪽을 바라봤다. 북한군과는 다소 다른 차림의 병사 두 명이 보였다. 한 사람은 로켓포를 지니고 있었다. 그때 다른 한 명의 병사가 수수밭 저쪽으로 튀어나갔다. 도망을 쳤던 것이다. 박씨와 나는 놀란 채 우리를 바라보고 있던 병사 하나를 덮쳤다. 소총과 같은 개인 화기가 그에게 없었던 게 천만다행이었다. 그는 로켓포만 가지고 있어서 우리 두 사람에게 총격을 가하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박씨가 그에게 뭐라고 몇 마디 물어본 것 같았다. 돌아오는 대답은 분명히 한국어는 아니었다. 두 사람이 중국어로 서로 뭐라고 말을 나눴다. 중공군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다른 전선에서는 어떤지 몰라도 국군 1사단 15연대 전면에서는 어쨌든 처음 발견한 중공군이었다.



그때 갑자기 온정리 쪽의 고지에서 포탄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멀리서 보고 있던 중공군이 포격을 가했던 것으로 보인다. 길가로 나와 있던 박씨와 나는 포로를 붙들고 수수밭으로 들어갔다. 포격이 멈추지 않았다. 그대로 있으면 포탄을 맞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박씨와 나는 포로의 멱살을 한쪽씩 붙잡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건너왔던 다리를 향해 뛰었다. 중공군 포격은 계속 우리 뒤를 쫓아 오고 있었다. 다리를 무사히 건넜다. 수색대가 모여 있는 쪽으로 가서 포로를 건넸다. 중공군 포로가 로켓포를 가지고 있던 점으로 봐서 그는 운산 북쪽에 진출해 있던 중공군의 탱크 저격수였던 것으로 우리는 짐작했다. 국군 1사단 3개 연대가 포진했던 운산에서는 우리를 지원하기 위해 이미 미군의 탱크가 와 있던 상황이었다. 엔진 소리 등으로 미군 탱크가 와 있는 것으로 파악한 중공군이 탱크 저격병을 전면에 내세웠다가 나와 박씨에게 포로를 내준 것이다.”



김대일씨는 중공군 첫 포로를 잡은 공로로 이듬해에 을지무공훈장을 받았다. 수색대원 전체와 함께다. 김씨는 “수많은 사람이 피와 땀을 바치면서 이겨낸 전쟁이 6·25”라며 “이름 없이 사라져 간 많은 희생자를 가능하면 많이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전쟁 중에 장교(갑종 9기)가 됐다. 원주 235 수송대대에 근무하다가 69년 소령으로 예편했다.



유광종 기자, 사진=신인섭 기자






여러분의 6·25 전쟁 증언 및 경험담을 기다립니다. 연락하실 곳은 e-메일 kjyoo@joongang.co.kr 팩스 02-751-5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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