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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오늘] 허울뿐인 ‘민족자결주의’에 헛된 희망 품은 식민지 조선

일본과 중국도 연합국의 일원이었지만 파리강화회의의 주도권은 미국·영국·프랑스·이탈리아가 쥐고 있었다. 왼쪽부터 영국의 로이드 조지, 이탈리아의 올란도, 프랑스의 클레망소, 미국의 윌슨 등 4강 수반(首班)들이 담소하는 모습.
1919년 1월 18일 제1차 세계대전에서 이긴 연합국 진영은 패전 동맹국 측에 대한 강화 조건을 토의하기 위해 파리강화회의를 열었다. 특히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1917년 볼셰비키 혁명으로 러시아에 사회주의 체제가 들어서자, 이듬해 1월 대전 종결을 위한 ‘14개 조 선언’을 내놓고 민주주의 진영의 맏형 노릇을 자임하고 나섰다. 14개 조 중에 들어 있던 ‘민족자결의 원칙’은 약소민족과 제국주의 진영 사이의 갈등을 세계혁명 전략으로 이용하려 한 볼셰비키 정권의 민족자결권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는 물론 식민지 여러 민족이 새로운 강국으로 떠오르는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 선언을 독립의 서광이 비추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윌슨은 식민지 이권 상실을 우려하는 승전국을 달래기 위해 이 조문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자결권은 전쟁의 결과 국제적인 고려 사항이 될 독일 식민지에 적용된다. 민족을 내걸고 불완전한 국가들이 강화회의에 입장하는 것은 좋지 않다.” 이에 따라 대한인국민회 대표로 회의에 가려 했던 이승만은 미국 정부의 비자 발급 거부로 출발조차 할 수 없었으며, 상하이 임시정부의 대표로 파리에 간 김규식도 입장을 거부당했다. “조선 문제는 파리강화회의에서 안건으로 상정되지 않을 것이다. 열강 중 어느 누구도 바보처럼 조선 문제를 거론해 일본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을 것이다”(『윤치호 일기』 1919년 1월 18일). 그때 윤치호의 예측대로 식민지 조선 문제는 고려의 대상도 될 수 없었다. 전승국의 일원으로 강화회의에 참여한 일본의 이익에 직결되는 우리 민족의 자결은 떡 줄 사람 생각도 하지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는 격이었다.



열강에 독립을 호소한 3·1운동과 1921년의 워싱턴 군축회의가 대답 없는 메아리가 돼 버리고만 뒤 민족주의 우파들은 일제와 타협하면서 경제와 교육 분야에서 실력을 양성하면 언젠가 올 국제정세의 변동에 의해 독립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반면 사회주의 좌파들은 조선의 독립을 보장한 1919년 8월 제2인터내셔널과 1920년 상해 임시정부에 200만 루블의 독립운동 자금을 약속한 소련에 희망을 걸었다. 1922년 제1차 극동노력자회의 참석자들은 워싱턴군축회의에서 서구 열강이 우리의 독립 요구를 외면한 것을 맹렬히 공격하면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꿈꾸었다.



냉전 붕괴 이후 좌파의 꿈이 미몽(迷夢)임은 백일하에 드러났다. 그러나 우파도 그때 남의 힘에 기대 독립을 얻으려는 잘못을 범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영원한 적과 동지가 없는 ‘힘의 정치’가 다시 작동하는 오늘. 가슴 쓰린 지난 역사가 우리의 치부를 비추는 거울로 다가선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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