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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용대 ‘일본군벌 타도’ 깃발 들고 항일 전쟁 시작

일본군 점령 지역에 침투해 폐허가 된 사찰의 담장에 항일 표어를 쓰는 조선의용군 화북 지대 선전대원. 중조(中朝)아닌 중한(中韓)이라는 표현이 눈길을 끈다. 김명호 제공
1937년 7월 7일 오후 10시, 일본군은 베이징 교외 완핑(宛平)현 노구교(蘆溝橋)에 주둔한 중국군에 선공을 퍼부었다. 8월 13일에는 상하이를 공격해 본격적인 중국 침략전쟁에 나섰다. 중국인들에겐 8년에 걸친 항일전쟁의 서막이었다. 7개월 전 합작을 선언하고 내전을 종식했던 국공 양당은 항전 태세에 돌입했다.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화북(허베이·서난·산시성 일대) 지역의 도시들을 점령했다. ‘조선인 징병제’를 반포하고 베이징·톈진 등에 ‘조선징병특별훈련소’를 설치해 점령지구에 거주하던 한국인들을 강제로 징발했다. 화북 지역에는 20만 명이 넘는 한국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조선민족통일전선연맹과 조선민족혁명당의 중심인물이었던 김원봉은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위원장 장제스에게 조선의용대 설립을 타진했다. 군사위원회 정치부 부부장 저우언라이와 문화선전공작을 담당하던 궈모뤄가 김원봉의 방안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조선민족혁명당·조선청년전위동맹·조선민족해방동맹·조선혁명자연맹이 공동으로 조선의용대 창설에 합의했고 국민정부는 이를 비준했다.

전쟁 발발 1년여가 지난 1938년 쌍십절을 전후해 조선의용대가 후베이(湖北)성 우한(武漢)에서 깃발을 올렸다. 직업혁명가·학자·군인·학생·부녀자·선원·상인 등으로 구성된 중국 관내 최초의 한국인 무장집단이었다. ‘항일전쟁 참전’과 ‘일본군벌 타도’를 기치로 내걸었다. 저우언라이는 ‘동방 피압박 민족과 해방 투쟁’이라는 연설을 했다.

조선의용대는 장제스가 직접 지휘하던 제5전구에 배속됐다. 우한 보위전을 치렀고 우한이 일본군에 함락된 뒤에는 중국군과 함께 13개 성, 6개 전구를 누볐다.

국민당 정보기관인 중앙조사통계국(중통)은 “조선의용대에 공산당 비밀 당원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이 있다”는 보고서를 계속 장제스에게 올렸다. 장은 조선의용대를 살아 나오기 힘든 작전에만 투입했다. 합작은 했지만 중공은 언제 돌변할지 모르는 비적집단과 별 차이가 없었다. 실제로 39년 중반부터 조선의용대에는 중공의 비밀 조직이 있었다.

초기의 치열했던 전투가 대치 국면으로 전환되자 조선의용대는 유격전과 대민 선전을 위해 화북 지역으로 전략적 이동을 단행했다. 41년 10월 29일 중통이 작성한 ‘조선 각 당파 활동 근황 보고’에 “조선의용대 분대장 박효삼과 조선민족혁명당의 영혼 석정(본명 윤세주)이 화북으로 이동했다”는 대목이 있고, 중공 중앙기관지 ‘해방일보’도 41년 10월 26일자에 조선의용대의 활동상을 큼지막하게 보도했다.

41년 늦은 봄 태항산 항일 근거지에 도달한 의용대는 ‘조선의용군 화북 지대’로 명칭을 바꿨다. ‘화북 독립동맹’과 연명으로 “항일을 원하는 노동자·농민·각계 인사와 연합해 화북에 거주하는 20만 동포의 권익을 위해 분투한다”는 선언문을 발표하고 무장선전대를 조직해 일제(日帝)가 시도 때도 없이 거론하던 내선일체와 대동아민족해방전쟁의 허구를 폭로해 저들의 치안 강화운동에 치명타를 안겼다. 41년 7월부터 이듬해 8월까지 한·중·일 3국의 문자로 작성한 230여 종의 전단 12만여 장과 만화 3만여 장을 일본군 점령 지역에 뿌려댔고 1400여 개의 구호를 담벼락에 써 붙였다. 얼마 전 조조(曹操)의 무덤이 발굴된 허난(河南)성 안양(安陽)만 하더라도 당시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노인들이 있다. “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적이 몇십 분 거리에 있어도 할 일을 다했다. 일본군 쪽을 향해 살포한 전단의 내용도 재미있었다.” 전사한 일본군들의 품 안에는 영락없이 조선의용군이 뿌린 전단이 있었다.

조선의용군의 활동이 소문을 타고 알려지자 계란 200개와 돼지고기 50근을 들고 의용군을 찾아갔던 한 촌장은 “우리가 위문품을 들고 가도 그들은 정중하게 거절했다. 조리사들 외에는 중국어와 일본어도 참 잘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중국 곳곳에 수많은 전설을 남겼지만 해방된 조국은 남과 북 어디에서도 그들을 찾지 않았다. 린뱌오의 동북야전군에 편입돼 국공전쟁에 참전했고 한국전쟁에서는 이들을 남침의 선봉에 내세웠다. 비극이었다. 휴전 후에는 연안파로 분류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것도 비극이었다.

여러 개의 정파가 연합해 만든 무장조직이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하더라도 조선의용군에 관한 기록은 들여다보면 볼수록 사람을 복잡하고 멍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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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