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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오늘] 첫 미국 이민선 호놀룰루 도착 … 고된 노동에도 독립운동 헌금

이민선이 들어오는 하와이 호놀룰루 부둣가에 늘어서 태극기를 흔들며 새로 오는 이들을 반기는 초기 이민자들의 모습. (『100년을 울린 겔릭호의 고동소리』, 현실문화연구, 2007)
“조선국 상민(常民)으로서 미국에 가는 자는 미국 전 지역에서 대지를 임차할 수 있으며 토지를 매수하여 주택이나 창고를 건축할 수 있다.” 1882년 맺어진 조미수호조약 제6조에 의해 미국 이민 길은 이미 열려 있었다. 그러나 미국령 하와이로의 이민은 1902년 주한 미국 공사 앨런에 의해 이루어졌다. “중국인은 미국 입국이 불가능하지만, 한국인은 하와이 입국이 가능하다.” 그해 3월 31일 대한제국 황제는 중국인이 배척받는 미국 이민이 가능하다는 발림 말에 넘어가 이민을 허용한 것은 아니었다.



“한발이 너무 심해 농작이 무망(無望)하므로 급하지 않은 토목공사는 일체 정지하고 모든 항구에서 미곡 반출을 금한다”(고종실록 1901년 10월 16일조). 방곡령이 내려지고 안남미 30만 석을 들여왔지만 백성들은 주린 배를 채울 수 없었다. 기근을 극복하고 외화도 획득하는 일거양득의 효과도 기대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하와이 이민이 한국의 주권 유지에 대한 미국의 관심을 크게 할 수 있다는 앨런의 설득은 황제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러나 이 땅의 사람들이 정든 땅을 떠난 가장 큰 이유는 굶주림 때문만은 아니었다. “가렴주구와 탐학에 시달리고 춥고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여 북쪽 러시아로 유랑하고 남쪽 하와이 방면으로 이주하고 있다. 그러나 각 정파는 이권을 쫓아 여러 당파로 갈려 분쟁만 일삼고 있다”(황성신문 1902년 12월 29일). 그때 디아스포라(diaspora)를 부추긴 것은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가혹한 정치(苛政猛於虎)’였으며, 친러·친일·친미로 갈려 파쟁을 일삼던 위정자들로 인한 정국불안이었다.



1902년 11월 오늘의 여권에 해당하는 집조(執照) 발급을 담당할 수민원(綏民院)이 세워졌으며, 뱃고동을 울리며 제물포를 떠난 최초의 이민선 겔릭호가 호놀룰루에 닻을 내린 날이 다음 해 1월 13일이었다. 하와이가 독립운동기지가 될 것을 우려한 통감부가 해외이민금지령을 발한 1905년 말까지 66회에 걸쳐 7394명이 이민선에 올랐다. 5700명이 3년간의 계약기간을 끝내고 하와이에 정주하였으며, 나머지 20%는 미국 본토로 이주하여 오늘 200만을 상회하는 한국계 미국인 사회의 뿌리가 되었다. 사탕수수 농장에서 날품팔이로 최저임금에 시달렸지만, 하와이 교민들 어느 누구도 매년 3~5달러의 독립운동 자금인 ‘애국금’ 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암울한 일제치하 그들은 상하이 임시정부의 외교독립 투쟁이나 대한군정서 등이 만주에서 펼친 무장 항쟁을 뒷받침한 든든한 자금원이었다. 그들의 피땀이 대한민국 건국의 밑거름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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