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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운산 전투 - 적유령 산맥의 중공군 ④ 급박해진 후퇴

1950년 10월 31일 평안북도 운산에서 중공군 1차 공세에 직면한 국군 1사단의 백선엽 사단장(왼쪽)이 미군 10고사포단 윌리엄 헤닉 대령(앞줄 오른쪽)과 함께 걸으며 후퇴 작전을 상의하고 있다. 쌀쌀한 날씨인데도 하복 차림인 것이 눈길을 끈다. [백선엽 장군 제공]


내가 타고 있던 지프에서 불과 300m 앞에서 중공군이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굽은 길 저 앞이었다. 1만여 명의 병력과 배속 미군을 지휘하는 국군 1사단장인 내가 적의 총구 앞에 고스란히 노출된 상황이었다. 차 안에는 운전병과 문형태 사단 참모장 등 세 명이 타고 있었다.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을까’라는 낭패감은 차라리 사치에 가까웠다.

커브 길 돌자 300m 앞 중공군 … 적 총구 보자마자 “차 돌려”



나는 황급히 “차를 돌려라”라고 명령했다. 당시 내 지프에는 조그만 트레일러가 붙어 다녔다. 현장 지휘를 하기 위해 야전에서 지내는 데 필요한 모포와 텐트 등을 싣는 용도였다. 이게 말썽이었다. 좁은 길을 급히 돌려고 하니 트레일러가 걸렸다. 운전병은 급히 지프에서 내려 일단 트레일러를 떼냈다. 그런 다음 차를 돌리고 다시 트레일러를 뒤에 건 다음에 출발했다. 적을 만날 당시 내가 탄 지프 뒤에는 트럭 한 대가 따르고 있었다. 이 트럭은 차를 돌리는 우리를 보자 급히 후진해서 사지를 빠져나갔다. 하도 다급해서 탈출에 몇 분이 걸렸는지 잘 모르겠다. 낙타머리 길의 초입을 벗어난 우리는 다시 길을 달려 운산으로 향했다. 이상한 것은 중공군이 사격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유가 궁금할 따름이다.



최근 노신사 한 분이 나를 찾아왔다. 원주에서 목회를 하는, 올해 87세의 고덕환이라는 목사분이다. 그분은 나와 만나기 전 편지를 한 통 보냈다. 6·25전쟁 초기 내가 지휘하던 국군 1사단 11연대 수송부에서 군무원 신분으로 운산 전투에 참가했다고 했다. 그분이 편지에서 묘사한 당시의 전장 상황은 이렇다.



백선엽 장군(오른쪽)이 1950년 운산 전투 당시 사단 운송부 군무원으로 참전했던 고덕환 목사와 지난해 12월 21일 만났다. 두 사람이 용산 전쟁기념관의 백 장군 사무실에서 지도를 들여다보며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 [오종택 기자]
“10월 하순의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1사단 11연대에 배속된 나는 약 8㎞ 떨어진 산에서 갑자기 ‘따콩 따콩’ 하는 소리와 함께 신호탄이 올라가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고요한 달밤의 정적을 뒤흔드는 꽹과리와 피리 소리가 함께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부대의 박격포는 신호탄이 올라오는 곳을 향해 불을 뿜었습니다. 산 속에서 보이지 않는 적이 우리 쪽을 향해 계속 사격을 해댔습니다. 본격적인 야간 전투의 시작이었습니다. 이때 의무 장교 한 사람이 나타나더니 나에게 100m 앞에 있는 지프를 가리키며 “저 차를 가져오라”고 명령했습니다. 나는 그 명령에 따라 지프를 향해 뛰어가면서도 ‘이제는 내 차례인가 보다’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누구나 죽을 수도 있는 상황, 이제 그것이 내게 닥쳐 왔다는 불안감이었습니다. 가서 보니 미군 지프였습니다. 차는 길가 도랑에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처음 지프를 몰던 미군은 부상을 당해 이미 후송됐고, 뒤를 이어 국군이 이 지프를 몰고 가다 총에 맞은 상황이었습니다. 그 국군 병사는 도랑에 굴러 넘어져 있었습니다. 그는 그 속에서 처절한 소리로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살려 달라”는 소리만 귀에 들어왔습니다. 고랑에 뛰어들어 군인을 꺼내 올렸습니다. 엔진을 걸어 차를 움직여 보았습니다. 한쪽 손으로 군인을 붙잡고 조심스레 차를 고랑에서 빼냈습니다. 그리고 의무 장교에게 와서 차와 부상 군인을 인계했습니다.”



고 목사님은 올해 6·25전쟁 60주년을 맞이하면서 감회가 새로워 편지를 보냈다고 했다. 그가 겪었던 그 처절한 상황이 나로 하여금 그 아팠던 당시의 기억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당시 중공군은 1사단 정면을 우회해 산 속 여기저기에 포진한 뒤 포위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낮에는 그나마 포병과 전차, 그리고 공중 지원으로 버텼으나 밤에는 고립된 채 중공군의 야간공격에 맞설 수밖에 없었다.



나는 지체할 수 없다는 판단을 했다. 중공군은 밤 시간을 이용해 묘하게 불안감과 공포감을 자극하는 피리 소리와 함께 공격을 가해왔다. 피리 소리는 개전 초 북한군의 전차 소리만큼이나 공포심을 자극했다. 적유령 산맥을 넘어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은 하복 차림의 우리 장병에게 또 하나의 적이 되고 있었다.



10월 31일. 나는 다시 운산에 갔다. 먼저 미군 10고사포 단장인 윌리엄 헤닉 대령을 만났다. 그는 아주 일그러진 표정으로 “아무리 생각해 봐도 오늘 밤을 견디기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왜 투지를 보이지 않느냐”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백 장군님, 솔직히 말해서 오늘 중에 철수하지 않으면 전멸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국군 1사단을 지휘하는 프랭크 밀번 미 1군단장에게 철수를 건의하라는 충고도 했다. 나는 곤혹스럽지만 현실을 주시해야 했다.



나는 다시 일선에 있는 11, 12, 15연대를 돌면서 연대장들을 만났다. 한결같이 “현재 상황이 너무 심각하다”고 말했다. 운산 북쪽으로 진출한 15연대의 상황이 가장 심각했고, 나머지 연대도 상당히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사면초가였다.



백선엽 장군



[전쟁사 돋보기] 윌리스 MB·포드 GPW

625 전장 누빈 지프의 원조




6·25전쟁 때 한반도를 누빈 지프는 미 육군이 제2차 세계대전 때 개발한 지휘관용 차량이다. 야전에서 사용하기 위해 차량 덮개를 없앴다. 원래 이름은 ‘윌리스(Willys) MB’ 또는 ‘포드(Ford) GPW’였다. 미국의 자동차회사인 윌리스와 포드가 생산해서다. 지프라는 이름은 1941년 2월 워싱턴데일리뉴스 기자가 처음 사용했다. 지프(jeep)는 ‘사용해보지 않은 새로운 것’ ‘신병’이란 뜻이다. 당시 지프 차량이 신기해 보였기 때문이다. 지프는 41∼45년 64만 대가 생산돼 유럽·아프리카 전선과 태평양전쟁에 투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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