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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오늘] 조선총독부, 경복궁 터를 잔디로 덮고 그 앞에 신청사를 세우다

조선총독부 신청사 건축 현장. 일제는 경복궁 내의 대다수 전각을 헐어버리고 그 앞에 르네상스 양식의 위압적인 총독부 신청사를 지었다. 조선왕조의 ‘초라함’과 일본 제국의 ‘위용’을, ‘야만’ 조선과 ‘문명’ 일본을 대비시키려는 의도였다.(사진 출처: 『민족의 사진첩』)
1926년 1월 7일, 남산 기슭에 있던 조선총독부가 경복궁 앞에 새로 지은 청사로 이전했다. 1915년 가을의 조선물산공진회가 끝난 직후 새 청사를 짓기 시작한 지 10년이 흐른 뒤였다. 일제는 한국 강점 5주년을 기념해 식민 통치의 성과를 내외에 널리 알린다는 구실로 오늘날의 산업박람회에 해당하는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했다. 장소는 경복궁으로 정했는데 이때 이미 총독부 신청사 건물을 경복궁 앞에 지으려는 계획을 세웠다. 조선왕조의 정궁(正宮)이던 경복궁이 갖는 상징적·문화적 의미를 충분히 고려한 결정이었다.



총독부는 경복궁을 공진회장으로 개조하면서 대다수 전각을 헐어버리고는 그 터 일부에 가건물들을 지었다. 50여 일간의 공진회가 끝난 뒤, 미술품 진열관만 박물관으로 전환시키고 나머지 가건물들은 모두 헐었다. 총독부 신청사 건립 공사는 그 직후 시작되었다. 그나마 남아있던 강녕전과 교태전도 1918년 창덕궁 화재 복구 공사 명목으로 헐렸다. 총독부는 건물들을 헐어낸 자리에 ‘잔디’를 심어 표시해 두는 일을 잊지 않았다.



잔디는 한자로 사초(莎草)라 쓴다. 아주 오랫동안 한국인들은 ‘사’라는 글자에서 죽음과 불길(不吉)을 떠올렸다. 4를 F로 바꿔놓은 엘리베이터는 부지기수이며, 3층 다음에 바로 5층으로 건너뛰는 건물도 적지 않다. 사초, 즉 잔디는 죽음을 상징하는 풀이었기에 무덤에만 썼을 뿐 사람이 기거하는 집 마당에는 심지 않았다.



총독부는 조선물산공진회를 참관한 사람이 160만여 명에 달한 것으로 집계했다. 당시 한국 인구의 10% 가까이가 이 행사에 동원된 셈인데, 그들이 잔디로 덮인 경복궁 뜰에서 무엇을 연상했을지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총독부는 경복궁만이 아니라 서울의 모든 궁궐에서, 전각을 헐어낸 자리를 빠짐없이 잔디로 메웠다. 한국인들의 뇌리에 자리 잡은 잔디와 무덤 사이의 연상(聯想)작용을 이용해 옛 궁궐들을 ‘왕조의 무덤’으로 인식시키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잔디와 무덤을 잇던 연상작용은 사라지고, 잔디와 궁궐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인상만 강해진 모양이다. 오늘날 한국인들의 ‘잔디’ 사랑은 끝을 모를 지경이다. 반세기 전부터 집 마당에 잔디를 심는 일이 다반사더니 근래에는 어지간한 산마다 온통 잔디로 덮인 골프장이 들어섰고, 심지어 강변에도 ‘금모래’ 대신 ‘금잔디’가 널렸다. 한 세기 전의 사람이 본다면 나라 전체가 무덤이 되었다고 탄식할 일이다.



전우용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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