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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익의 인물 오디세이] 김진선 예비역 대장

예비역 육군대장 김진선씨는 사단장 시절 장병들과의 축구시합에서 모두 2백67골을 기록했다고 한다.



사단장이 공을 몰고 오는데 누가 감히 깊은 태클을 하거나 반칙을 했겠느냐는 계급사회의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그가 대단한 스트라이커임은 틀림없는 것 같다. 그는 '만능' 스포츠맨답게 축구.농구.배구.럭비.테니스.골프에다 무술까지 두루 능하다.



*** 산 자의 전쟁 죽은 자의 전쟁

그가 최근, 1969년 맹호부대 전투중대장으로 베트남전에 참여한 경험을 '산 자의 전쟁, 죽은 자의 전쟁' 이란 제하로, 마치 스포츠맨이 왕년의 명승부를 회상하듯이 박진감 넘치게 그려냈다.

전투에 관한 느낌도 솔직함이 지나쳐서 예를 들면 이렇게 적고 있다.

"사냥도 해보았지만 짐승을 잡는 것보다 더 재미있는 일이 전쟁터에서 적을 잡는 것이다. 적이 죽는 것은 즐거움이요, 쾌락의 극치였다. 인간의 본성 속에 자리잡고 있는 정복욕과 게임에서의 승리감이 죄책감을 압도하고도 남았다. 또 상대방도 나를 죽이려 하는 사람들이다. 양쪽은 생사를 건 오락을 즐길 뿐이다."

그는 물론 이 고백을 반성의 차원에서 쓰고 있다. 그는 책의 에필로그에서 "지금 다시 전쟁이 일어나서, 내가 총을 들고 싸워야 한다면 물론 나는 목숨을 걸고 용감하게 싸울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다시는 젊은 시절처럼 적을 죽이는 것이 흥미있고, 무조건 영광스럽다는 생각으로 싸우지는 않을 것이다.

적어도 전쟁의 정당성 여부는 생각해 볼 것이다.

그리고 적이 총탄에 쓰러질 때는 가슴 아프게 생각할 것이다" 며 베트남의 발전과 베트남 전사들의 명복을 빌고 있다.



김진선은 노태우 정권 때 육본 인사참모부장.수방사령관.육본 참모차장으로 잘 나가다가 김영삼 정권 때 2군사령관으로 밀려나 두달 후 대장으로 예편했다.

베트남전에서 카우보이 모자처럼 챙이 넓은 정글모를 쓰고 람보를 방불케하는 그의 활약상도 흥미를 자아내거니와 퇴역 대장으로부터 우리 군의 이런저런 모습을 들어보는 것도 의미가 작지 않을 듯해 그를 만났다.



- 참전 경험을 적나라하게 밝힌 책을 쓰게 된 동기는 뭔가.



"전역 후 94년에 하노이를 방문했다. 참전 20여년 만이었다. 그때 베트남, 호치민에 대한 개념이 한 순간에 바뀌어갔다. 호치민에 대한 그들의 극진한 존경심을 보며 20여년 전 우리 중대의 클레이모어 폭발에 하체가 날아간 채 고래고래 소리치며 부하를 지휘한 베트콩 지휘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런 정신으로 그들은 프랑스와 미국을 물리친 것이었다. 호치민은 내가 제일 존경할 만한 지도자였다.

그래서 베트남에 관한 책을 모아 읽고, 참전 당시 일기와 가족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을 모아 다시 정리했다 . 이 책은 젊은 전투중대장의 고백록 같은 것이다."

*** 호치민은 존경할만한 지도자

- 베트콩의 시체를 깔고 앉아 C레이션을 까먹고, 베트콩 마을로 판단했다지만 민간인촌에 포격을 가해 사람들이 다치는 등의 내용 때문에 월남전참전용사회로부터 항의를 받았다는데.

"사실이 그러했다. 책의 취지는 솔직하게 밝힐 건 밝히고, 잘못된 건 반성하자는 것이었다. 전투가 벌어지면 인간적 고려가 개입할 틈이 없었다. 월남전참전동지회가 이 책 때문에 우리 집 앞에서 시위를 하겠다는 말을 들었는데 내 취지를 알면 이해할 것이다.

민간인촌 포격은 우리가 설치한 클레이모어를 한 목동이 계속 쓰러뜨리고 있어 마을 외곽에 위협을 가한 것인데 논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다친 것이다. 그건 잘못됐다."

- 책을 보면 중대장을 '산적두목' 이라고 부르는데.

"전쟁터에서 부대를 지휘하다 보면 각자의 고유한 폼이 나온다. 나는 우리 부대의 안전을 위한 마스코트로 어느 부대원에게 수염을 깎지말라고 했다. 그리고 나는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매복.수색에 나섰다. 그런 식으로 하니까 그런 별명을 붙인 모양인데, 하여튼 나는 '베트콩 총알이 내 몸에 날아와도 도로 튕겨나갈 것이다' 라고 큰소리쳤다.

그건 병사들을 공포로부터 해방시키는 방법이었다. 또한 전쟁터에서 말이나 행동의 유머러스한 모습도 그같은 기능을 갖고 있다."

-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총질을 하는 게 무슨 놀이 같은 느낌을 준다.



"최전선 전투원은 사실 그런 느낌으로 싸워야 한다. 두목은 두목답게 전투에 항상 앞장서야 하고, 매사 냉철하게 판단하되 유쾌하게 놀아야 한다. 부하들은 카우보이 모자 때문에 적의 총알이 피해간다고 믿었다. 귀국할 때 그 모자를 가지고 가려했는데 소대장이 '그 모자 없으면 제가 죽습니다' 고 간청해 물려주고 왔다. 그 소대장도 귀국할 때 분대장에게 주고왔다고 했다."

- 베트남전에 참전한 사람들은 그 경험을 숨겨야 할 개인사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베트남전 자체가 정의롭지 못한 전쟁이었다는 역사적 평가 때문이겠지만 참전군인들이야 나라의 부름을 받고 응한 것 아닌가.



"참전용사들은 현충일 같은 날 국립묘지의 전우들을 찾아와 매번 같은 이야기를 한다.



'이 친구는 죽으면서 자기 어머니께 열심히 싸웠다고 전해 달라고 말했지' 하는 식이다. 그게 전우들이다. 지난번 어느 신문사에 베트남전에서 고엽제 환자가 된 전우들이 들어가 소란을 피웠는데 그들의 입장을 잘 고려해야 할 것이다. 잘했다는 게 아니라 그들의 입장에서 정말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 그 당시 중대원들은 만나 봤는가.



"1년에 두번쯤 만난다. 사실 한번 지휘관은 영원한 지휘관이다. 의족(義足)을 한 부하가 부인과 디스코를 추거나 오른손을 잃은 부하가 왼손으로 마이크를 잡고 노래부르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 나야 출세도 하고 그랬지만 그들은 그냥 평범하게 살아가는데 오죽 힘들겠는가. 그럴 때는 혼자 화장실에 가서 운 적도 있다."

- 전투에서 부하가 전사할 때는 어떤가.



"털보 김하사가 전사했을 땐 사흘 동안 계속 울었다. 털보는 아군의 오인사격으로 죽었다. 오인사격을 한 다른 중대의 병사와 중대장이 사과하러 왔을 때 죽여버리겠다고 총을 들고 발광을 했다. 부대원들에게 야자수를 하나 캐오라고 해 부대 내에 심고 이 나무를 털보라고 생각하자고 했다."

*** 부하장병 전사한뒤 3일간 울기도

- 하노이에서 과거 베트남 혁명전사를 만났을 때의 기분은 어땠는가.



"전쟁을 했던 상대방과 세월이 흐른 다음에 만나니까 전우란 생각이 들었다. 마치 복싱선수들이 시합이 끝난 뒤 서로 등?두드리며 껴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노이에서 내가 베트남전에 참가했다고 밝히니까 그 자리에 있던 베트남 혁명전사가 먼저 '전우를 만났다' 며 반가워했다. 그때 회개를 생각했다.

나는 참전 당시 월맹군으로부터 현상금까지 걸린 사람이었다. 나는 군인으로서 최선을 다해 적을 죽이려고 했지만 그건 과거의 일일 뿐이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나는 그들에게 죄인이었던 것이다."

- 그런 생사의 고비를 넘긴 경험이 그후의 생활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베트남에서 결정적인 죽음의 고비를 네번 넘겼다. 귀국선을 타고 오면서 전쟁에서 있었던 추악한 기억들은 모두 떨쳐버리자고 생각했다. 사람을 너무 죽였구나 하는 생각이 물밀듯이 들어왔다.

그래서인지 그후 기독교에 귀의했고 부하들에 대한 사랑만큼은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하노이 방문 이후의 생각인데 내가 비록 나라의 명에 의해 전쟁을 수행했지만 이 죄를 어떻게 하면 씻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에 싸였고 그래서 책까지 내게 됐다."

- 갑자기 전역을 하게 됐는데 경위는 뭔가.



"졸지에 전역한 셈이 됐다.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며 군대생활이 길지 않을 것이라고 예감했다. 2군사령관으로 가 있는데 참모총장 비서가 '총장이 보잔다' 고 전화했다. 예편을 직감하고 총장실에 가 '다음은 총장 차례입니다' 하고 나왔다."

- 12.12 때 수경사 상황실장이었고 그 후 노태우 정부 때 수방사 사령관을 지내는 등 일종의 '정치군인' 으로 여겨져 YS정권의 숙군차원에서 전역한 게 아닌가.



"12.12 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양측의 교전을 막는 것이었다. 나는 당시 어느 편도 아니었다. 일종의 내전이 일어나면 상대방이 완전히 쓰러질 때까지 싸우는 게 내전의 성격이다. 이걸 막으려고 혼신을 다했다. 결과적으로 이긴 편에 들어간 셈이 됐을 뿐이다.

나는 지금까지 당시 상황에 대해 아무에게도 말한 적이 없다. 소설가 천금성씨가 전두환 정부가 들어설 때 '황강에서 북악까지' 라는 책을 쓰면서 나를 찾아왔지만 그때도 말을 하지 않았다."

- 왜 말을 하지 않았나.

"공치사해서 덕 볼 생각이 없었다."

- 金장군이 하나회 회원이라는 말도 있고 아니라는 말도 있는데 사실은 뭔가.



"나는 하나회에 들어가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회 사람들에게 견제받아 진급을 늦게 했다. 이 관계로 책을 쓰면 한권은 넉넉하게 될 것이다. 수방사령관 시절에는 하나회 문제 때문에 밑의 보직을 비하나회 장교에게 줬다. 이 때문에 모처에 가서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그는 여러 사람의 말로 미뤄 봐 하나회 회원은 아닌 것으로 판단되지만 노태우 정권의 신임을 받아 당시 군내의 파워게임의 중심에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 12.12 이후 군의 정권장악은 어떻게 생각하나.

"군인이 정치에 개입하지도 말고 정치인이 군인을 이용하지도 말아야 한다. 잘못된 것이다. 분명한 것은 앞으로는 군의 정치개입이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 그러면서 왜 지난 선거에는 나갔나.

"전역 후 나름대로 나라에 기여할 수 있는 바를 찾다가 선거라는 정통성 있는 방법을 통해 내 뜻을 펼쳐보자는 것이었다."

- 선거판이 어떻던가.



"솔직히 난장판이었다. 이런 식으로 선거하다가는 정말 큰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방의 작은 군에서 사람들 사이를 원수처럼 갈라놓는 게 선거였다. 선거 때 사람들끼리 얘기하는 걸 들어보면 좋은 사람은 하나도 없고 전부 다 나쁜 사람들이라고만 하더라. 한마디로 거짓말쟁이 시합 같았다."

그는 다음 선거에도 나갈 생각이 있느냐는 물음에 "생각이 없다" 고 말했다가 "지금 단정짓지는 말자" 고 수정했다.



이헌익 스포츠.문화 에디터

<김진선은 누구…>

▶1939년 충북 음성 출생

▶59년 육사 19기

▶69년 주월 맹호부대 수색중대장

▶12.12 당시 수경사 상황실장

▶84년 체육부대 창설

▶88년 7사단장, 육본 인사참모부장

▶90년 수방사령관

▶91년 육본 참모차장

▶93년 2군사령관 거쳐 육군대장 예편

▶98년 국가비상기획위원장

▶2000년 민주당 충북괴산지구당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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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