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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 금호’와 ‘배드 금호’로 나눠 구조조정 속도 높여라

지난해 12월 30일 오남수 금호아시아나그룹 경영전략본부 사장(오른쪽)이 서울 여의도 산업은행에서 경영정상화 방안을 설명하고 있다. 왼쪽은 김영기 산업은행 수석부행장. [뉴시스]
초점이 흐려진 눈이 물끄러미 천장을 향했다. 그러다 고개를 돌려 생수를 벌컥 들이켰다. “죄송하다”며 목이 멨다. 그룹 구조조정 방안을 발표한 금호아시아나그룹 오남수 경영전략본부 사장 얘기다. 그에게 2009년 12월 30일은 평생 잊지 못할 날이 될 게 분명하다. 2006년 11월 15일처럼 말이다. 이날은 금호그룹이 대우건설 인수 본 계약을 맺은 날이고, 그는 실무 사령탑이었다.

위기의 금호그룹, 향후 과제는

금호그룹의 두 개 계열사가 워크아웃(채권단 공동관리)된다. 그룹 주력사 중 하나인 금호산업과 금호타이어다. 그룹의 핵심인 금호석유화학과 아시아나항공은 자율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 자율이란 이름을 붙였지만 채권단이 보고만 있을 리는 만무하다. 그룹 위기의 도화선이 된 대우건설은 산업은행으로 넘어간다. 주당 1만8000원이다. 주당 2만6000~2만7000원에 샀던 회사다. 현재 주가는 1만2000원대다. 금호로선 속이 쓰린 가격이지만 산은은 큰 맘 먹고 배려했다고 생각한다.

구조조정 방안을 발표한 날 저녁 열린 금호그룹 임원회의는 침통했다. 금호그룹은 외환위기 때도 공적자금 한 푼 받지 않았다. 채권 은행 속을 크게 썩인 적도 없었다. 이 점은 박삼구 명예회장이 늘 자랑스러워하던 일이었다. 박 명예회장은 이날 회의에서 “내부적으로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하고 외부적으로 획기적인 수익을 창출해 그룹의 경영 정상화를 앞당기자”고 말했다.

박 명예회장은 이날로 모든 지분을 채권단에 담보로 내놨다. 광주택시로 시작해 항공회사로, 한국의 대표 물류기업으로 성장해 온 바로 그 그룹의 주식이다. 김영기 산은 수석부행장은 “담보로 맡기는 주식에는 경영책임(의결권)도 포함된다”고 말했다. 선 굵은 의사결정으로 대형 인수합병(M&A)을 성사시키며 재계 8위로 그룹을 키운 박 명예회장이 의결권을 담보로 내놓은 것이다. 담보에 대한 처분권도 채권단에 있다. 최대주주의 의결권, 즉 경영권이 박 명예회장의 손을 완전히 떠날 수도 있는 것이다. 다만 채권단은 일정기간 경영권을 보장했다. 짧게는 3년, 길게는 5년이다. 눈 예보에 모두 귀가를 서두르던 30일 밤, 금호 직원들은 쉽게 사옥을 떠나지 못했다.

크리스마스 이브의 최후 통첩
하루 전인 12월 29일. 금호그룹은 워크아웃을 ‘결국’ 받아들였다. 워크아웃만큼은 피하려 했기에 ‘결국’이고, 결과적으론 더 서둘러 결단했어야 했기에 ‘결국’이다. 워크아웃 방안을 담은 ‘플랜B’가 본격적으로 검토되기 시작한 것은 11월 18일 무렵이다. 역설적이게도 금호가 대우건설 인수제안서를 받은 날이다. 혹시나 했는데 뚜껑을 열어보자, 채권단의 마음이 확 돌아섰다. 인수 제안서를 낸 참여자들은 채권단이 바라는 수준의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대우건설 인수자들의 윤곽이 나오기 전까지 산은도 금호 문제가 무리 없이 풀릴 것으로 여겼다. 당시 산은 고위 관계자는 “형제 갈등만 불거지지 않으면 금호는 잘될 것”이라고 말했다. 산은이 구조조정 고삐를 좀 더 바짝 당겼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은 그래서 나온다. 이래저래 한 달을 허비했고 그 사이 금호에 대한 시장의 우려는 증폭됐다.

‘더 이상은 안 되겠다’며 산은은 플랜B를 구체적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금융 당국과도 교감했다. 골자는 출자전환을 근간으로 한 워크아웃, 산은의 대우건설 인수였다. 그러나 금호는 여전히 대우건설 매각을 통한 자력 회생에 무게를 실었다. 플랜B는 ‘그룹을 내놓으라’는 소리로 들렸기 때문이다. 백방으로 뛰며 ‘믿어 달라’고 했다. 하지만 금호의 위기설이 파다하게 퍼진 상태에서 불거졌던 형제 갈등은 이미 나쁜 기억으로 입력돼 있었다. 추는 기울었다. 산은은 “더 이상 협상은 무의미하다. 선택하라”며 최후통첩을 했다.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결정타는 시장에서 나왔다. 금호그룹 계열사의 주가는 곤두박질쳤고, 신용등급은 하향 조정됐다. 12월 29일 밤 금호는 워크아웃을 수용했다.

연말 앞두고 밤샘 줄다리기
딱 하나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었다. 금호석유화학이었다. 금호석유화학이 워크아웃되면, 금호그룹의 소유권이 날아갈 수 있어서다. 통상 워크아웃 과정에선 대출금이 주식으로 전환(출자전환)된다. 기존 주식에 대한 감자도 병행된다. 이렇게 되면 기존 대주주 지분은 줄고 채권단 지분은 늘어나 최대주주가 바뀔 수 있다. 금호석유화학은 금호그룹의 지주회사라 할 수 있다. 이 회사 최대주주가 바뀌면, 그룹 전체의 주인이 바뀐다. 자정까지 이어진 협상에서도 결론을 내지 못했다.

12월 30일 오전 재개된 협상에서 ‘철저한 자구노력을 전제로 채권단 협의를 통하여 자체 경영정상화 추진’으로 접점을 찾았다. 실용적 합의였다. 협상을 성사시키려면, 연말이란 상징적 시간을 넘겨서는 안 됐다. 해를 넘기면 시장의 불안이 더해질 수도 있다. 외형상으론 금호그룹 일가는 그룹 경영권을 유지할 수 있게 됐다. 체면도 살렸다.

호남의 대표기업이란 점도 고려할 수밖에 없었다. 정치적으로 편 가르기에 이용되면 정부로선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채권은행 입장에선 입이 나올 법한 ‘경영권 5년 보장’도 이런 맥락에서 나왔다. 대신 산은은 주당 1만3000원에 사려고 했던 대우건설을 1만8000원에 인수키로 했다. 채권은행의 협조를 끌어내기 위해 산은이 금호그룹의 손실을 일부 떠안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게다가 내용상으론 워크아웃이란 표현을 쓰지 않을 뿐 강력한 구조조정을 하고, 이를 채권단이 챙기겠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결과적으로 금호 구조조정의 밑그림은 산은이 만든 플랜B의 얼개대로 됐다.

경영권 보장은 당근이자 채찍
그림을 완성하는 것은 금호그룹의 몫이다. 금호그룹의 솜씨에 따라 완성된 그림은 큰 차이가 날 수 있다. 자율 구조조정이란 애매한 영역이 있어서다. 게다가 경영권 5년 보장은 협상 과정에선 당근이었지만, 앞으로는 채찍이다. 5년 보장을 뒤집으면 5년 후면 경영권자가 바뀔 수도 있다는 말이다.

색을 칠할 곳과 칠하지 않을 곳부터 골라야 한다. 2003년 SK글로벌(현재의 SK네트웍스)을 워크아웃한 후 고스란히 되찾았던 SK그룹과 금호그룹은 사정이 다르다. SK의 부활에는 혹독한 구조조정이 밑거름이 됐다. 다른 요인도 있다. SK글로벌은 SK에너지의 기름을 주유소에 공급하는 회사다. 일부 계열사는 SK글로벌을 통해 물품을 구매했다. 계열사가 뒤를 받쳐주는 게 가능했다.

또 SK㈜는 SK글로벌에 대한 상거래 채권을 가지고 있었다. 이 채권이 주식으로 전환되면서 SK그룹은 SK글로벌을 큰돈 들이지 않고 되찾았다.

그러나 금호그룹은 이런 구조가 아니다. 박삼구 명예회장이 M&A에 그렇게 공을 들인 것도 이 때문이다. 계열사 간 시너지, 쉽게 말하면 계열사끼리 서로 밀고 당겨줄 힘이 금호엔 부족하다. 금호그룹은 이미 많은 계열사와 자산을 팔았거나 팔 예정이다. 금호렌트카·금호생명·고속터미널 부지 등이다. 남은 기업도 모두 살려야 할지, 과감하게 포기해야 할지를 가려야 한다.

특히 출자전환으로 기존 주주 지분이 확 주는 금호산업과 금호타이어를 되사오려면 경영 ‘정상화’로는 부족하다. ‘어닝 서프라이즈’를 몇 번은 해야 한다. 채권단의 고위 관계자는 “금호가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머뭇거리지 말고 확실하게 구조조정할 ‘배드 금호’와 살려야 할 ‘굿 금호’를 나누는 것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그래야 구조조정의 속도도 높일 수 있다. 금호산업은 명암이 나뉜다. 고속사업 부문은 캐시 카우고, 건설 부문은 부동산프로젝트(PF) 보증 5조4000억원에 눌려 있다.

그룹의 전략도 다시 세울 때다. 복기부터 해야 한다. 금호그룹이 대우건설을 욕심을 낸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금호그룹의 주력인 항공사업은 유가·환율 등 해외 변수에 따라 부침이 심한 업종이다. 대우건설은 그룹의 항공리스크를 분산시키기 위해 필요했다. 그러나 건설업의 변동성이 항공사업보다 더 할 수 있다는 점은 눈여겨보지 못했다. 금호산업의 건설부문과 대우건설을 빨리 통합하지 못한 것도 아쉬운 대목이다.

이제 대우건설은 금호그룹의 품을 떠난다. 또 다른 대어인 대한통운은 남았다. 이 회사를 그룹 회생에 핵심적 기능을 하게 하는 것이 좋을지, 그룹 자금난 완화에 쓰는 게 좋을지는 주인인 금호그룹이 가장 잘 안다. 채권단은 당장 대한통운을 흔들 이유는 없다. 대한통운은 금호그룹 지배구조에선 꼬리에 해당해 지금 팔아봐야 다른 계열사에 즉각적인 재무구조 개선 효과를 주기 어렵기 때문이다. 금호의 전략적 판단에 달렸다는 얘기다.

그룹의 핵심 중추인 아시아나항공이 되살아나고 있는 것은 금호 경영진이 크게 기대하고 있는 부분이다. 비수기인 11월 흑자를 낸 데 주목하고 있다. 워크아웃 성공사례를 써가고 있는 팬택은 삼성전자와 LG전자라는 엄청난 플레이어 사이에서 9분기 연속 흑자를 기록했다. 팬택에 비하면 금호그룹은 훨씬 크고, 강하다.

구조조정 업무에 정통한 한 은행 관계자는 리더십을 강조했다. “금호는 누가 뭐래도 지금 위기다. 위기엔 선장이 중요하다. 박 명예회장이 다시 일선으로 나와야 한다. 지금도 실질적인 결정을 하지만, 뒤에 있는 것과 앞으로 나서는 것은 다르다. 책임 논란을 두려워해선 안 된다. 앞장서서 회사를 살리는 게 책임 경영이다.”

위기는 늘 기회다. 좋은 포도주는 척박한 땅에서 만들어진다. 수분과 영양을 찾아 뿌리가 힘을 다해 밑으로 뻗다 보면, 질 좋은 와인용 포도가 열린다. 무엇보다 ‘경영권을 보장하는 워크아웃’이 결실을 낸다면, 워크아웃을 하면 기업을 날린다는 두려움에 구조조정 시기를 놓치는 악순환도 끊을 수 있다. 금호가 금융 시장에 진 빚을 제대로 갚는 길이기도 하다.

포함의 아픔을 아직도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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