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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한 해의 끝에서 생각하는 국격

이명박 대통령이 큰일을 했다. 시쳇말로 확실하게 ‘한 건’ 했다. 공사비만 200억 달러에 달하는 아랍에미리트(UAE) 원전 공사 수주라는 메가톤급 빅뉴스로 2009년 대한민국의 세밑을 화끈하게 장식했으니 말이다. ‘경제 대통령’ 잘 뽑은 보람이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사단법인 민생경제정책연구소는 ‘기적을 일군 미소 대통령, 국민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다’는 제목의 논평을 냈다. 이 대통령이 이룬 쾌거를 ‘만루홈런’에 비유하며 “서민들의 어려움을 한 번에 날려 버렸다”고 감동을 쏟아 냈다. 공사 수주를 삐딱하게 보는 한 신문사를 향해 폐간을 촉구한 단체도 있다. 자유주의진보연합은 원전 사고의 위험성을 경고하며 “과거의 공산품 수출 정책처럼 정부가 원전 수출을 독려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꼬집은 이 신문 사설을 ‘쓰레기 글’로 규정하고, 이런 ‘창피한 글’을 쓰느니 차라리 자진 폐간하라고 목청을 높였다.



나는 이 대통령의 세일즈 외교, 비즈니스 외교의 성과를 폄하할 생각이 없다. 잘한 것은 잘한 대로 인정하는 게 옳다고 본다. 특유의 상인적 감각을 발휘해 수주에 기여한 공로는 평가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이 대통령이 아니었다면 성사가 어려웠을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것은 낯간지럽다. 국격(國格)과도 맞지 않는다.



대통령의 전화 몇 통과 막판 직접 담판으로 수백억 달러짜리 엄청난 공사가 결정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UAE 나름대로 꼼꼼하게 득실을 따져 보고 한국에 주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다 된 밥에 숟가락 하나 얹어 놓고 생색을 내느니, 재주는 기업들이 부리고 공은 대통령이 차지했다고 비아냥대는 것도 듣기 거북하지만, 마치 이 대통령 개인의 업적인 양 치켜세우는 것도 딱하긴 마찬가지다. 한국 기업들의 실력과 노력,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의 외교력이 조화를 이룬 결과라고 보는 것이 상식적이다.



국가 대항전에서 한국이 프랑스를 꺾었다고 흥분하는 것도 낯 뜨겁다. 프랑스가 제시한 조건이 한국이 제시한 조건에 못 미쳤기 때문에 밀린 것이지, 프랑스가 한국과 국운을 걸고 전쟁이라도 벌였단 말인가. 프랑스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우리만 흥분해 프랑스를 이겼다고 의기양양해한다면 이 무슨 우스운 꼴인가.



프랑스 언론은 프랑스의 패배는 당연한 결과라며 이번 패배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는 보도를 잇따라 내놓고 있다. 프랑스 컨소시엄의 전열(戰列)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 프랑스 언론이 지적한 첫째 패인이다. 유럽형 가압경수로(EPR)를 최초로 건설한 프랑스전력공사(EDF)가 참여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바람에 엘리제궁이 개입한 끝에 이달 중순에야 최종 컨소시엄 구성을 마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한국전력공사(KEPCO)가 중심이 돼 처음부터 일사불란하게 달려든 한국 컨소시엄에 비해 신뢰감을 주기에 역부족이었다는 것이다. 최종 입찰가에서도 프랑스는 한국의 1.8배에 달하는 360억 달러를 써 냈다고 한다. 입증된 안전성에 유리한 공기, 품질보증에 가격경쟁력까지 갖췄으니 결과가 뻔한 게임이었다는 게 프랑스 언론의 분석이다.



2010년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의 서울 개최를 앞두고 이 대통령은 유난히 국격을 강조하고 있다. 수주전에서 프랑스를 꺾고, G20 정상회의를 유치했다고 국격이 저절로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경제력만으로 국격이 결정되는 것도 아니다. CNN에 국가 이미지 광고를 한다고 당장 높아지지도 않는다. 국격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품격의 총합이기 때문이다. 인격이 모여 국격을 이룬다고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지도자의 품격이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기 마련이다. 결국 지도자부터 모범을 보여야 한다. 남을 배려하고, 존중하고, 겸손하고, 사려 깊고, 흥분하지 않고, 자제할 줄 아는 지도자 아래서 국격은 올라갈 수 있다.



“제가 한 일은 별로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그동안 한국의 원자력 산업 발전을 위해 묵묵히 애써 온 과학기술인과 기업인들의 노력이 모여 이뤄 낸 결과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안전하고 효율적인 원전을 정해진 기한 내에 만들어 UAE가 우리에게 보내 준 신뢰에 보답합시다.” 수주가 최종 확정되는 순간, 나는 이 대통령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길 기대했다.



G20 정상회의 유치에 성공했다고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만세삼창을 부르고, 왕조시대에나 어울릴 만한 ‘용비어천가’ 소리가 들리는 것은 국격과는 거리가 먼 일이다. 내일이면 2010년이다. 지도자부터 국민 모두가 진정으로 국가의 품격을 생각하는 한 해가 됐으면 좋겠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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