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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년 동안 내게 웃어준 아내 '당신은 내 삶의 이유'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울게 한 사람, 웃게 한 사람, 보고싶은 사람은

가족, 친구-. 사람들이 가장 보고 싶어하는 존재다. 때론 그들 때문에 웃고, 때론 그들의 말 한마디에 깊은 상처를 받기도 한다.

중앙SUNDAY가 인터뷰한 108명의 시민 대부분은 가장 보고 싶은 사람(92명), 자신을 울린 사람(65명), 웃게 한 사람(75명)으로 가족과 친구를 꼽았다.

너무 가까워 자칫 그냥 지나쳐 버릴 수 있는 가족ㆍ친구들에 관한 몇 가지 이야기를 들어봤다.



남편이 아내에게 전화를 건다. ‘내 이쁜 사랑’이란 이름으로 신호가 간다. 아내 전화기에 ‘내 신랑님’이란 이름과 함께 하트 모양 배경 속 남편 사진이 떴다. 23일 일산 서구 탄현동 강도현(58·한국 장애인고용촉진공단 부산 직업능력개발센터 대표)씨 집에서 만난 부부는 기자에게 평소 통화모습을 보여줬다. 환갑을 눈앞에 두고 있는 강씨는 아내(오맹자·53)와 매일 세 번 이상 통화를 하고 메시지를 보내야 마음이 편해진다. 밤에는 영상통화로 얼굴을 봐야 잠을 잘 수 있다고 한다.



“활짝 웃는 중년의 아내 모습을 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실감해요. 내 삶의 이유예요.” 강씨에게 아내는 살아가는 힘이다. 결혼 29년째이지만 아내는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사람이다.부부는 6년 전부터는 주말부부로 지내고 있다. 2004년 강씨가 부산으로 발령나면서부터다. 주말에 일산 집에 강씨가 오면 부부는 밀렸던 이야기를 하느라 쉴 틈이 없다. 매일 통화를 해도 할 말이 너무 많단다. 시간이 아까워 TV도 없앴다. 외출할 때면 항상 손을 꼭 잡고 다닌다.



부부에게도 다른 이들처럼 위기가 있었다. 결혼 후 3년이 지난 어느날 강씨는 갑자기 아내가 싫어졌다고 한다.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그렇게 1년여를 보냈다. 아내는 남편을 믿고 묵묵히 기다렸다. 강씨는 “어느 날 요리를 하는 아내의 뒷모습을 보는데 순간 감정이 북받쳐 오르더군요. 조용히 뒤에서 안아주면서 미안하다고 용서를 빌었죠”라고 말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게만 살아도 시간이 아까운데 그땐 내가 왜 그랬을까 생각하면 너무 후회된다고 말하는 강씨는 “강도(강도현)가 맹자(오맹자)랑 사는데 더욱 더 사랑해야죠” 라며 아내의 손을 꼭 잡았다.

 







특수교사'내겐 너무 예쁜 아이들'

하루 하루가 시트콤 같은 학교가 있다. 주인공은 특수학교인 서울정문학교 중학부 학생 80명과 이 학교의 배지혜(25) 음악교사다. 배 교사는 학생들 때문에 지난 1년을 웃고 울고 했다고 한다. 배 교사를 웃게 만든 일화다. 학기 초 배 교사는 새 옷을 입고 오는 학생에게 “처음 보는 옷 입었네. 참 예쁘다” 라며 칭찬을 해줬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학생들이 매일 아침 자기 옷도 봐달라며 배 교사 주위로 모여들었다. 학생들은 자신의 모자나 목도리, 머리띠를 손으로 가리켰다. “예쁘다”는 말을 듣고 싶었던 것이다. 겉옷을 벗어 속옷을 보여주는 학생도 있었다. 배 교사는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선생님에게 관심을 받고 싶어하는 아이들의 행동을 이해하게 됐다. 배 교사는 지금도 아이들의 새 옷을 보면 “예쁘다” 라고 말해준다.



배 교사의 특수학교 교사생활은 쉽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 장애인 봉사활동을 하면서 생각했던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지적장애·자폐·정서장애·지체장애 등을 가진 학생들의 돌발행동에 어떻게 대처할지 몰라 당황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학교에서 배운 이론은 아이들의 행동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안 됐다. 남 몰래 울기도 많이 울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들을 보는 눈이 열렸다. “아이들이 악의가 있거나 반항하려고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었어요. 단지 장애 때문에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데 익숙지 않았던 것이에요.”



배 교사는 장애인에 대한 사회의 고정관념을 깨는 것이 꿈이다. 학생들이 일반인과 같은 어엿한 사회인이 될 때까지 그는 아이들을 열심히 가르칠 것이라고 다짐했다.

 

피부색 편견이 슬픈 인도인 영어 강사

6개월 전 한 여자 아이가 태어났다. 아이의 이름은 다니엘라 혹은 이하늘. 인도의 친할아버지와 한국의 외할아버지가 각각 이름을 하나씩 지어줬다. 아빠는 경기도 한 초등학교에서 방과후 학교 영어교사로 일하고 있는 마샬 윈(30). 2004년 인도로 유학온 한국인 아내와 결혼해 2005년부터 한국에서 살고 있다. 올 한 해 마샬 윈에게 행복한 웃음을 준 사람은 아내와 딸이었다. 인도 사람이 한국사회에 적응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대뜸 어디 공장에서 일하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 피부색이 검은 외국인은 으레 공장에서 일할 것으로 생각한 것이었다.



얼마 전에도 속상한 일이 있었다. 마샬 윈이 강의하는 방과후 학교 강좌는 항상 정원을 넘겼다. 대기자 명단이 필요할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날 학부모 공개강좌를 열었다. 그런데 공개 강좌 이후 학생수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학부모들이 유색인 영어 교사를 꺼려했기 때문이다. 마샬 윈은 “물론 속상하긴 하지만 인도에 대해 한국사람들이 잘 몰라서 그러는 것이라 생각해요. 제대로 알게 되면 그러지 않을 거예요”라고 말했다. 그가 경험한 대부분의 한국사람은 돕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친절했다고 한다.



낯선 한국에서 외국인으로 살아가면서 아내와 딸의 존재는 그에게 큰 힘이 됐다. 요즘 이 부부는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한국사회에서 혼혈인으로 살아가야 할 아이 때문이다. 부부는 “우리 아이가 성인이 될 때쯤이면 한국사회에서 외국인에 대한 편견이 사라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덕수궁 수문장의 눈물과 희망

송영무(43·덕수궁 앞 왕궁 수문장 교대식 배우)씨는 좀처럼 웃지 않는다. 직업 때문이다. 송씨는 덕수궁 대한문 앞 서울왕궁 수문장 교대식에서 긴 방망이를 든 능장수(죄인 체포 담당) 역할을 맡고 있다. 매일 세 번씩 교대식이 열리는데 행사 중에는 절대 웃으면 안 된다. 조선시대 왕궁을 지키는 수문장들을 재현하는 행사라 근엄한 표정을 지어야 한다. 실제로 행사 도중 웃었다 관람객들의 항의를 받은 적도 있다. 그는 “일종의 직업병이죠”라고 말했다.그러나 그가 웃음을 잃은 더 큰 이유는 쉽지 않은 세상살이 때문이다. 98년 중국인 변강(38)씨와 결혼했지만 3년 후부터 지금까지 경제적인 이유로 떨어져 살고 있다. 아내는 충남 아산에서 중국어 과외교사를 한다. 부부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만난다. 이때가 송씨가 환한 웃음을 짓는 때다.



1997년 외환위기로 직장을 잃고 방황하던 송씨에게 아내는 새 삶을 찾아준 은인이었다. 소극적이고 폐쇄적인 성격 탓에 송씨는 모든 사람을 적으로 생각할 정도로 힘들게 살았다. 그가 사회에서 재기할 수 있었던 것은 아내의 믿음과 사랑 덕이었다. 매일 저녁 아내와 통화하고 그 힘으로 다음 날 하루를 버틴다는 송씨는 “잘해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능력이 안 되는 것이 한입니다”라며 큰숨을 내쉬었다. 그는 항상 보고 싶은 사람, 미안함 때문에 울게 만드는 사람, 나를 웃게 하는 유일한 사람이 모두 아내라고 답했다. 아내와 한 집에서 함께 살 수만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는 송씨의 새해 목표는 서울로 아내를 데려와 덕수궁 앞 왕궁 수문장으로 일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세 번의 전쟁, 살아남은 게 축복

강순자(77·광화문 해치마당 자원봉사자)씨는 세 번의 전쟁을 겪었다. 1932년 도쿄에서 태어난 강씨의 첫 번째 전쟁은 11살이던 1943년 일본에서 겪은 태평양전쟁이었다. 전쟁 후반 전세가 미국 쪽으로 기울면서 도쿄 하늘에는 미군 비행기가 가득했다. 전쟁이 뭔지도 몰랐던 11살, 강씨는 옥상에 올라가 비행기를 구경하는것이 마냥 즐거웠다고 했다. 바로 옆 동네가 폭격을 당하고 하늘에서 비행기가 폭파돼도 전혀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처음 보는 광경이 신기했다. 1945년 해방이 되고 이듬해(1946년) 한국으로 들어온 강씨는 18세이던 1950년에 두 번째 전쟁인 6·25를 겪었다. 전쟁이 시작될때 강씨는 명동의 한 회사에서 속기사로 일하고 있었다.



“회사 바로 앞에 큰 호텔이 있었는데 6월 22일부터 미국인들이 갑자기 짐을 가득 싸들고 나가데…. 우리들은 전쟁이 난다는 생각은 전혀 못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사람들은 미리 알았었던 것 같아.”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뒤 미처 피란을 가지 못한 강씨는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겼다. 강씨는 “내가 당돌한 면이 있어 그런지 그땐 전혀 겁이 안 나더라고. 근데 요즘 청계천을 지나다보면 그때 시체가 수북이 쌓여있던 모습이 생각나 기분이 이상해”라고 말했다.



그렇게 두 번째 전쟁에서도 살아남은 그가 겪은 마지막 전쟁은 지난달, 11월 3일에 벌어졌다.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감기 한 번 안 걸릴 정도로 건강하던 그가 심근경색 진단을 받고 수술대에 오른 것이다. 당시 강씨는 “사람이 이렇게 죽는구나”라고 생각하며 마지막을 생각했다. 몇 번의 전쟁을 거치면서 숱하게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처음으로 겁이 났다. 다행스럽게도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났고 강씨는 다시 건강을 되찾게 됐다. 때문에 그는 올 한 해 자신을 웃게 만든 사람으로 자신을 수술해 준 서울대병원 강현재 교수를 꼽았다. 강씨는“새 삶을 선물 받은 것 같아. 다시 자신감이 생겼어”라며 환하게 웃었다.



임현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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