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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의 시시각각] 막걸리, 스토리를 팔자

앙((醠, 막걸리)은 천출(賤出)이다. 천출이 으레 그렇듯 세상 시고 달고 쓴맛에 통달했다. 앙의 맛이 ‘시큼털털달콤쌉싸라’한 것도 그래서다. 왕가의 자손인 ‘맑은 술(淸酒)’과는 피부색부터 달랐다. ‘하얀 술(白酒)’ ‘뿌연 술(濁酒)’로 불린 이유다.



천출이지만 앙은 군자의 덕을 좇았다. ‘남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화내지 않으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人不知而不溫, 不亦君子乎).’ 앙은 이 『논어』 구절을 가슴에 새기고 살았다. 고려 때 이규보는 ‘돈 있을 땐 청주를 먹다 돈이 없어 막걸리를 마시니 자꾸 체한다’(白酒詩)고 했다. 그래도 앙은 원망은커녕 감사한다. 그는 이 땅에 앙의 기록을 처음 남긴 사람이다. 그가 아니었다면 앙은 족보조차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이규보는 『국선생전』에서 ‘앙의 아비는 현(賢)으로 국성(麴聖, 맑은 술)의 동생이다. 현은 네 아들을 두었는데 익, 두(酘), 앙, 임(醂)이다. 익은 빛깔 있는 술, 두는 두 번 거른 술, 앙은 막걸리, 임은 과실주다’라고 적고 있다.



조선조 500년을 앙은 서민의 벗, 없는 이들의 친구로 살았다. 영욕도 갈렸다. 한때는 조선땅에서 팔리는 술의 칠할(70%)을 장악했다. 나랏술(國酒)이니 어미술(母酒)이란 이름도 얻었다. 그러나 크게 기뻐할 것도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1965년 박정희는 쌀로 술 빚는 걸 막았다. 그러자 ‘카바이트 밀막걸리’가 유행했다. ‘머리 아픈 놈’ ‘골 때리는 친구’ 소리는 참을 만했다. 맥주·소주보다 못하다는 얘기엔 억장이 막혔다. 한 번 힘을 잃으니 급전직하, 수많은 막걸리 도가가 도산했다. 근자엔 불량식품 취급까지 받아야 했다.



대반전이 일어난 건 올해다. 앙은 인생유전을 또 실감했다. 삼성경제연구소에서 꼽은 올 히트상품 1위에 올랐다. 사람·물건을 통틀어서다. 그 예쁘고 잘나간 김연아까지 제쳤다. 시장에선 위스키와 소주·맥주를 조금씩이지만 밀어냈다. 수출도 사상 최대다.



인기 비결을 놓고 온갖 설이 나왔다. 과학이 먼저 동원됐다. ‘효모와 유산균이 살아있다’는 것이다. 민족 정서도 끼어들었다. 신토불이, 달리 무슨 설명이 필요하냐는 거다. 등산 인구가 늘면서 ‘하산주’로 떴다는 분석도 나왔다. 싸고, 배부르고, 덜 취하고, 소통에 좋고, 맛도 좋다는 5덕(德)도 부족해 ‘남녀노소 불문’ ‘쌀 소비 촉진’의 6덕·7덕까지 칭송이 쏟아졌다.



그러나 잘 나갈 때 더 경계해야 한다. 앙은 누구보다 그걸 잘 안다. 그러자니 당장 내년부터 할 일이 많다. 우선 우후죽순, 780여 개의 술도가부터 정비해야 한다. 위생조차 엉망인 곳 투성이다. 사고 한 번이면 끝이다. 우지파동, 분유파동, 수많은 파동의 말로가 생생하다. 이 땅의 백성은 쏠림의 귀재들이다. 열광만큼 돌아서는 것도 빠르다. 철저히 준비해야 외면받지 않는다.



무엇보다 급한 건 품질 관리다. 갑자기 수백 종이 쏟아져 ‘내가 최고’라 우기니 소비자는 헷갈린다. 이럴 때 필요한 게 타산지석이다. 프랑스 와인이 좋은 예다. 1855년 나폴레옹 3세는 와인 도가와 상인들이 서로 등급을 매기게 했다. 이들은 누구네 기술이 뛰어난지, 포도밭 사정은 어떤지 손바닥 보듯 뀄다. 좋은 와인에 높은 가격이 매겨졌고 소비자는 안심하고 값을 치렀다. 지금도 보르도는 매년 세계 와인 페스티벌을 연다. 평가와 심사를 거쳐 그해 와인 값을 결정한다. 축제 시즌엔 국내외 관광객들로 인근 호텔이 모두 동날 정도다.



우리도 당장 내년부터 막걸리 콘테스트를 열자. 술도가가 모두 모여 축제를 열자. 등급을 매겨 팔되 맛과 향에 얹어 스토리를 팔자. 고려 문인 이규보가 먹고 배앓이 한 술, 비운에 죽은 전 대통령이 즐긴 술, 소백산 맑은 물에 이천 쌀로 빚은 술…. 막걸리엔 500년 세월 이 땅의 골과 물과 바람의 스토리가 넘친다. 와인 세계화를 이끈 샤토(양조장), 테루아르(토양), 마리아주(음식 궁합)가 별건가. 죄 물렀거라, 막걸리 나가신다.



이정재 중앙SUNDAY 경제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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