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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은 학자들의 장례식을 거치면서 전진한다”

경제학의 아버지인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1776)』이나 20세기 최고의 경제학자인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고용·이자 및 화폐에 관한 일반이론(1936)』을 읽지 않고도 경제학 학위를 충분히 받을 수 있다. 대부분의 경제학 분야에서 그렇다.

‘경제학자들의 경제학자’ 폴 새뮤얼슨 교수 타계

그러나 14일 타계한 폴 새뮤얼슨 교수의 『경제학』을 읽지 않은 경제학도는 드물다. 1990년대, 2000년대에 나온 경제학 개론·원론서 곳곳에도 새뮤얼슨 교수의 영향이 묻어있다. 그가 ‘저작권’을 주장할 만하다.
1948년에 발간된 『경제학』은 당시 MIT에서 전공 필수였던 학부 경제학 강의 교재로 저술됐다. 명료한 것으로 유명한 『경제학』의 저술 목표는 학생들이 경제학을 이해할 수 있고 즐길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40개 언어로 번역돼 400만 부가 팔렸다. 아직도 매년 5만 부씩 팔린다. 새뮤얼슨 교수는 3년에 한 번꼴로 개정판을 냈다. 그는 1988년 AP통신과 인터뷰하면서 “좋은 책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지속적인 영향력을 갖게 되리라는 것은 몰랐다”고 말했다. 흥미로운 일화도 있다. 당시 세 쌍둥이가 태어나 생활비가 더 필요했는데 새뮤얼슨 교수의 친구들이 ‘책을 써서 돈 벌라’고 권유했다는 것이다.

‘경제학’ 지금도 한 해 5만 부 팔려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인 에드워드 글레이저 교수는 14일 뉴욕 타임스 기고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하버드대 박사 과정 학생들에게 첫 학기 미시경제이론을 가르친다. 적어도 한 시간에 다섯 번씩은 새뮤얼슨의 존재를 느끼게 된다.”

새뮤얼슨 교수가 13일 매사추세츠 주 벨몬트에 있는 자택에서 별세했다고 그가 70년 가까이 근무한 MIT가 발표했다. 엔터테인먼트 분야 유명 인사의 일거수일투족이 큰 관심을 끄는 세태에서 위대한 학자의 사망은 조용히 묻히는 뉴스거리밖에 되지 않았다. 현대인의 관심이 온통 경제 문제에 쏠려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얄궂은 일이기도 하다. 새뮤얼슨 교수는 ‘근대 경제학의 아버지’로 불리기 때문이다. 그로 말미암아 경제학이 과학이 됐다. 새뮤얼슨 교수는 경제학에 수학을 공통의 언어로 제시했다. 그 자신의 표현에 따르자면 ‘수학적인 서치라이트(mathematical searchlight)’다. 그는 생각보다 우리 삶 가까이 있다. 국가와 기업의 정책 결정 배경에 그가 있다.
새뮤얼슨 교수는 고전학파와 케인스학파의 이론을 접목시켜 신고전학파를 이끈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경제학』은 케인스의 이론을 전파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자신과 케인스 이론의 관계를 어떻게 봤을까. 새뮤얼슨 또한 케인스를 20세기 최고의 경제학자라고 인정했다. 그가 뽑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3대 경제학자는 애덤 스미스, 케인스와 레온 발라(Leon Walras)였다. 그러나 새뮤얼슨 교수는 케인스에 대한 회의도 많이 했다. 처음부터 케인스를 수용하지 않았으며 말년에는 스스로를 ‘포스트케인지언(post-Keynesian)’이나 ‘카페테리아 케인지언(Cafeteria Keynesian)’이라고 표현했다. ‘카페테리아 케인지언’은 ‘카페테리아 가톨릭 신자(Cafeteria Catholic)’를 흉내 낸 표현이다. 낙태·피임·동성애·혼전 관계 등의 문제에 대해 교리를 따르지 않는 ‘이름뿐인 가톨릭 신자’라는 뜻이다.

현대 경제학도들이 새뮤얼슨을 피하기 힘든 이유는 그의 연구 분야가 여러 경제학 영역에 걸쳐 있기 때문이다. 그는 후생경제학·재정이론·국제경제학·소비자 이론 등의 분야에서 400편 이상의 논문을 썼다. 새뮤얼슨은 자신이 ‘경제학의 마지막 제너럴리스트(generalist)’라고 생각했다. 같은 학과 동료가 뭘 하는지 같은 분야가 아니면 모르는 현실을 고려할 때 그의 말은 타당하다.

그러나 새뮤얼슨은 각 분야에서 스페셜리스트(specialist) 중의 스페셜리스트이기도 했다. 15일자 뉴욕 타임스 칼럼에서 폴 크루그먼은 영국 역사가·철학자인 아이자이아 벌린(Isaiah Berlin)의 사상가 분류법을 빌려 고인에 대한 찬사를 보냈다. 벌린은 ‘고슴도치와 여우(The Hedgehog and the Fox·1953)’라는 에세이에서 ‘많은 것을 두루 아는 사람’을 여우로, ‘중요한 한 가지를 깊이 아는 사람’을 고슴도치로 비유했다. 크루그먼에 따르면 새뮤얼슨은 ‘중요한 여러 가지를 많이 아는 사람’이었다. 평생 중요한 것 한 가지를 내놓기 힘든 게 학자의 인생인데 새뮤얼슨은 경제학에 8개의 아이디어를 내놨다는 것이다.

천재성과 성실성 겸비한 학자
새뮤얼슨 교수가 ‘경제학자의 경제학자(an economist’s economist)’가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운도 작용했다. 하이드파크고등학교에 다닐 때 한 선생의 영향으로 주식 시장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는 1932년 1월 2일을 자신이 경제학자로 새로 태어난 날로 기억했다. 토머스 맬서스의 인구론에 대한 강의를 들은 날이다.

새뮤얼슨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는 천재성과 성실성을 겸했다. 그에겐 읽은 책의 내용을 모두 기억하는 천부적인 머리가 있었다. 시카고대에 16세에 입학했으며 1985년 은퇴 후에도 연구를 계속했다. “해야 할 것이면 빨리 하는 게 좋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연구할 때에는 세 시간 정도 집중한 다음 쉬면서 마음이 무의식적으로 문제 해결에 나서도록 유도하는 방법을 썼다.

그는 얼핏 보면 오만한 사람이었다. 시카고대나 하버드대를 다닐 때에 교수의 나이나 지위를 인정하지 않고 비판했다. 예일대에서 행한 한 강연에서는 “MIT 교수가 하버드대로 옮기면 양 대학의 질적 수준이 모두 올라간다”는 말로 여러 사람의 속을 뒤집어놨다. 그는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쓰고 싶은 글을 쓰는 자유인이 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케네디·존슨·카터 대통령의 경제 고문 역할을 했으나 공직을 맡는 것을 극히 꺼렸다. 워싱턴DC에 일주일 이상 머물지 않았다는 것을 자랑 삼아 말하기도 했다.

지금은 하버드대 학생의 30%가 유대인이다. 케네스 애로, 밀턴 프리드먼, 폴 크루그먼, 조셉 스티글리츠 등 내로라 하는 경제학자는 다수가 유대인이다. 새뮤얼슨이 하버드대 교수가 되지 못한 것은 그가 폴란드에서 이민 온 유대인이자 케인지언이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 그의 성격에도 문제가 있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가 MIT로 간 것은 하버드로서는 큰 손실이었다. MIT는 1941년 경제학 박사 과정을 개설했고 MIT 경제학과는 하버드·시카고·프린스턴·스탠퍼드를 멀찌감치 따돌리기도 했다. 60년대 중반에는 미 법무부의 독점금지 담당 부서가 MIT 경제학과가 국립과학재단(NSF)의 펠로십을 너무 많이 받는다는 점을 우려할 정도가 됐다.

새뮤얼슨은 학자의 사회적 기능을 중시했다. 그는 뉴스위크에 1966년부터 1981년까지 칼럼을 썼다. 한국 독자들을 위해 YBM/Si-sa에서 발간한 시사영어연구에 지난해 12월까지 20여 년간 칼럼을 실었다.

그는 겸손한 사람이기도 했다. 자신이 최고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케네스 애로, 밀턴 프리드먼 등과 함께 근대 신고전 경제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는 공로를 독차지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모든 과학이 그룹 활동으로 발전한다고 봤다.

학생들에게는 지극히 관대한 스승이었다. 재주 있는 학생들에게 시간을 할애하는 게 학자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그에 대한 평가가 칭찬 일변도는 아니다. 경제학자가 점쟁이는 아니지만 그의 예측은 여러 번 빗나갔다. 특히 소련 경제를 과대평가하며 『경제학』의 1989년 판에선 이렇게 썼다. “많은 회의론자들이 예전에 믿었던 것과는 달리 소련 경제는 사회주의 경제가 작동하고 번성할 수 있다는 증거다.” 1970년대에는 매년 초 파이낸셜 타임스에 미국의 신년 경기예측을 내놨는데 많은 경우 빗나갔다.

그가 경제학에서 창의성의 여지를 줄였다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 심지어는 월스트리트발 금융 위기의 뿌리도 그가 주도한 경제학의 수리화에 있다는 주장도 있다. 물론 그는 “수학은 경제 분석의 여러 방법 중 하나가 아니라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한편 말년의 새뮤얼슨은 경제사 연구의 중요성을 새롭게 자각하기도 했다.

그의 당파성이 지적되기도 한다. 그는 ‘골수 민주당원’이었다. 조지 W 부시의 8년이 불필요한 비극이라고 생각했으며 버락 오바마의 당선에 환호했다.

새뮤얼슨 교수는 “경제학 같은 부정확한 과학은 학자들의 장례식을 딛고 진전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의 전에도 그의 후에도 새뮤얼슨 같은 위대한 학자는 없다”는 찬사도 있지만 과학이 여럿이 함께하는 활동이라는 그의 말에 따르면 우울한 과학(dismal science)라고 불리는 경제학이 희망의 과학으로 불릴 날은 반드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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