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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 신앙고백

성탄의 계절이다. 휘황찬란한 빛을 발하는 도심의 크리스마스 장식들과 백화점 세일로 계절을 느낀다. 생각하면 희한한 일이다. 2000여 년 전 중동의 작은 마을에서 살다간 한 청년이 오늘날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 탄생을 시끌벅적하게 경축하고 있으니 말이다.

기독교인들에겐 ‘기쁘다 구주 오신 날’이지만, 나머지 사람들에게 크리스마스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세모의 감회와 더불어 가족과 연인이 더 가깝게 느껴지는 날일까, 크리스마스 장식을 만들어 파는 사람들에겐 대목이고, 거리에 넘치는 산타 패션은 마치 산타클로스의 생일인 듯한 착각을 불러온다.

정작 크리스마스의 주인공에 대해서 우린 얼마나 알고자 했는가. 성경과 교리를 가끔 접해보긴 했어도 그다지 속 시원한 설명을 듣지 못했을 터이다. 석연찮은 출생사는 그렇다 치고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다 신성모독죄로 극형에 처해진 이 사람. 더욱이 그를 따르던 무리들에 의하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하늘로 올라간 유일무이의 구세주. 기독교인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그가 우리를 위해 일하고 있다 믿으며 심지어 그를 만났다는 사람들도 여럿 있다. 실체라 하기엔 황당하고 집단최면이라기엔 너무 오래 지속돼 온 이 존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이라고 한다.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하게 혼돈스러운 존재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반신반인도 아니고, 천지만물의 주인이자 창조주인 하나님이 또한 사람이라니. 도대체 왜? 물론 인간 예수는 우리와 같은 인간은 아니었다. 인간의 원형이라 할까, 이 세상에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던 완벽한 무오(無汚)의 인간으로 상정돼 있다. 설령 그렇더라도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뭐가 아쉬워 이 땅에 내려오시고 게다가 십자가에 매달려 비참한 죽음을 겪어야만 했을까. 인간의 구원이 목적이었다면 하나님답게 장엄하고 성스럽게 할 수도 있었을 텐데…. 하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모양새부터 말이 아니다. 어느 시골의 여관, 그것도 방이 없어 말구유에서 평범하기 그지없는 유대인 부부의 아들로 강림하셨다. 다 좋다 치더라도 지난 2000년간의 서구 역사를 돌아볼 때 하나님의 구원 프로그램은 그리 효과적이었던 것 같지 않다. 전쟁과 피의 역사이니 말이다.

성경이나 기독교 신학, 더욱이 기독교인들의 역사적 행태에 대한 비판과 반론은 기독교 역사만큼이나 길다. 영원무한과 지고지선을 갈구하는 인간의 종교적 심성에 비춰 질투심에 불타고 자기가 택한 백성만 챙기는 구약의 하나님을 어떻게 절대보편의 신으로 받아들일까.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의문투성이다. 그런데 이 모든 회의와 반론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지점이 있다. 바로 하나님이 인간을 못 말리도록 지독히 사랑한다는 교리다. 이 믿음을 받아들인다면 기독교 신의 기이한 행장(行狀)에 수긍이 가지 않을 수 없다.

누구라도 제대로 사랑을 해 본 사람은 다 안다. 사랑은 손해 보는 것이며 기득권을 포기하는 것임을.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마구간으로 강림한 예수는 그가 그토록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 사람 곁에 머물렀다. 사랑은 그 대상의 입장에 기꺼이 서는 것이다. 사랑은 또한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미련하게 보일 만큼 오래 참고 인내의 고통을 감수한다.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애끓는 짝사랑 이야기가 바로 성경이다. 자기희생적인 사랑만큼 마음을 움직이는 강력한 힘이 없다는 것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한 사랑은 시공을 초월해 영원히 빛난다. 우리의 사랑도 종교도 삶도 모두 이기심에 오염되었기 때문에 힘이 없다. 마구간이 아닌 궁궐을 끊임없이 갈망하는 우리에게 예수가 보일 리 없다. 마음이 가난하지도 순수하지도 않은 나이기에 올해도 예수 없는 크리스마스를 맞아야 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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