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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하드웨어 만들고, 다음에 장인 구했다

포항 선수들이 7일 도쿄국립경기장에서 열린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사우디아라비아의 알 이티하드를 2-1로 누르고 우승한 뒤 시상대에 올라 트로피를 들어올리고 있다. 포항은 아시아 최강의 자격으로 클럽월드컵에 나가 4강 위업을 이뤘다. [사진공동취재단]
프로축구 포항 스틸러스의 2009년은 특별했다. 포항은 K-리그에서 3위에 그쳤지만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에선 우승했다. 아시아 최강 클럽 자격으로 출전한 클럽월드컵에서는 4강에 진출했다. 한국 프로축구팀의 클럽월드컵 4강 진출은 포항이 처음이다. 남미 챔피언인 아르헨티나의 에스투디안테에 져 결승 진출에 실패했으나 포항의 위업은 찬사 받아 마땅하다. 포항은 ‘월드 클래스 클럽’이 되어 국제 무대에서 경쟁한다는 오랜 꿈을 실현했다. 이 같은 성공의 의미는 단지 몇몇 경기에서의 승리가 가져온 결과로 받아들일 수 없다. 오랜 도움닫기 끝에 이룬 큰 도약이다.

박태준의 스틸러스 웨이, 포항 ‘세계 클럽 4강’ 일궈

포항은 ‘스틸러스 웨이’를 모토로 삼은 구단이다. 스틸러스 웨이는 눈앞의 승리에 연연하는 대신 감동과 즐거움이 있는 축구를 하겠다는 포항만의 방식, 포항만의 철학을 담은 말이다. 그러므로 스틸러스 웨이는 포항이 월드 클래스로 나아가기 위한 통로이며 출구다. 이 모토는 올해 등장했다. 그러나 그 뿌리는 국내에서 가장 긴 역사를 가진 포항 구단이 창단한 1973년에 가서 닿는다. 스틸러스 웨이를 역주행해 출발점으로 향하면, 누구보다 크고 긴 그림자를 드리운 거인을 만난다. 포항에 강철의 제국을 일으켜 세운 진정한 스틸러, 박태준 전 회장이다. 그는 축구를 사랑했고, 그가 일으킨 철강 산업처럼 축구에서도 세계와 어깨를 겨룰 꿈을 꾼 사나이다.

포철 만들 때와 같은 방식
95년, 월드컵 유치를 선언한 한국을 국제축구연맹(FIFA) 실사단이 방문했다. 한국이 보여줄 축구 인프라는 포항제철 공단 안에 있는 축구전용 경기장뿐이었다. 당시로서는 국내 유일의 전용구장이었다. 지방 도시에 우뚝 선 전용구장은 실사단에 강한 인상을 남겼다. 지금은 ‘스틸 야드’라고 불리는 이 전용구장을 지은 사람은 박태준 전 회장이다. 스틸 야드는 포항이 월드 클래스를 향해 출발하는 데 발판이 된 스타팅 블록과도 같은 상징물이다. 포항제철이 무에서 유를 창조한 대역사였듯, 스틸 야드의 건설도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이 없었다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스틸 야드가 완공된 90년 포항에는 공설운동장이 있었다. 프로축구 경기를 열기에 부족함이 없는 경기장이었다. 따라서 포항이 전용경기장을 지을 절박한 이유는 없었다. 박태준 전 회장은 2004년 중앙일보에 연재한 ‘쇳물은 멈추지 않는다’라는 제목의 회고록에서 “포항에 한국 최초의 축구전용 구장을 세울 때는 뒷말도 많았다”고 털어놓았다. 당연한 일이다. 오직 축구만을 위해 지은 이 경기장 운영에 첫해만 9억여원의 적자가 났다.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그라운드를 찾아가 잡초를 뽑았다.

박태준 전 회장의 사고는 간단했다. 경제를 일으키기 위해 제철소가 필요했듯 축구를 잘하기 위해 좋은 경기장이 필요했다. 이런 점은 태릉선수촌과 체육회관 건설을 통해 한국 스포츠가 세계로 도약할 발판을 마련한 민관식 전 대한체육회장을 연상시킨다. 64년 도쿄올림픽 직전 체육회장이 되어 일본을 실사하면서 선진 스포츠의 인프라와 기술을 접한 민 전 회장은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그는 스포츠 인프라와 스포츠 과학 없이 스포츠 발전이 없다고 판단했다. 정권 실세였던 민 전 회장은 박정희 대통령의 신임을 업고 정부 예산과 기업 협찬을 끌어다가 태릉에 선수촌을, 무교동에 체육회관을 건설했다. 두 스포츠 인프라는 한국 스포츠가 세계로 나아가는 데 필요한 스타팅 블록이었다.

김기수엔 복싱 체육관 지어줘
박태준 전 회장에게는 ‘선경험(先經驗)’이 있다.
그는 65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청와대로 달려간다. 박 전 대통령은 박 전 회장에게 “국민의 사기 진작을 위해 세계챔피언이 필요하다”며 김기수를 언급한 뒤 “뭐가 필요한지 물어보고 도와주라”고 지시했다. 박 전 회장은 김기수를 위해 신설동에 체육관을 짓고 주먹으로 세계 제일이 되라는 뜻으로 ‘권일체육관’이라는 간판을 달았다. 김기수는 이듬해 6월 25일 장충체육관에서 박 전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탈리아의 니노 벤베누티를 누르고 한국 최초의 프로복싱 세계챔피언이 된다. 챔피언을 만들기 위해 체육관을 짓는다. 이것이 ‘스틸러’ 박태준의 방식이다.

하드웨어를 만든 다음에는 소프트웨어를 채워 넣는다. 구단의 소프트웨어는 팀이고 팀의 구성 요소는 선수다. 소프트웨어가 작동해서 만들어내는 콘텐트가 경기다. 박태준은 선수 욕심이 강했다. 그 덕분에 포항은 이회택·최순호·황선홍·홍명보 등 한국 축구의 전설들을 보유했다. 특히 황선홍과 홍명보는 프로축구의 드래프트 제도를 무시하고 ‘보쌈 싸기 식’으로 스카우트한 선수들이다. 황선홍과 홍명보는 계약금 1억원으로 제한된 드래프트제에 반발해 국내 프로 입단을 거부했다. 홍명보는 상무에 입대했고, 황선홍은 독일 2부리그로 향한다. 우여곡절 끝에 92년 홍명보, 이듬해 황선홍이 포항에 입단했다. 포항(즉 박 전 회장)이 뒤를 받치지 않았다면 두 선수가 선수 생명을 건 결정을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박 전 회장은 왜 축구를 좋아했을까? 일본에서 태어난 그는 야구가 친숙했지만 광복을 맞아 귀국한 뒤 축구광이 됐다. 그는 회고록에서 두 가지 이유를 들었다. 첫째는 축구는 우리나라의 국기(國技)라는 점, 둘째는 빈곤한 시절의 한국이 축구에서만은 일본을 이겼다는 점이다. 73년 그가 창단한 포스코 축구단(현재의 포항)은 신일본제철 축구단과의 친선경기에서 항상 승리했다. 박 전 회장은 “친선경기를 관람할 때면 나는 신일철 사장에게 ‘오늘은 우리를 한번 이겨 보라’고 약을 올리곤 했다. 큰소리칠 게 하나라도 있어서 좋았다”라고 썼다. 신일철은 ‘제철의 어른’이었지만 축구에서는 어린아이와 다름없었다.

新日鐵 사장에 “한번 이겨보라”
박 전 회장처럼 축구를 사랑하고, 월드 클래스의 축구를 꿈꿨던 사나이가 또 있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다. 김 전 회장은 79년 대우 로얄즈 축구단을 창단하고 김주성·김종부·정용환 같은 스타들을 영입해 국내 최강의 프로팀을 만들었다. 대우 구단은 이재명·김영남 등 김 전 회장의 측근들이 교대로 단장을 맡아 운영했다. 국내 리그에서는 현대 축구단과 ‘자동차 라이벌전’을 벌였지만, 김 전 회장은 세계 무대를 꿈꿨다. 그는 “은퇴한 뒤에는 대우 축구단을 이끌고 세계 순회경기를 하겠다”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그의 꿈은 대우 그룹의 몰락과 함께 사라졌다. 대우 축구단은 2000년 부산 아이파크로 이름이 바뀌었다. 부산 구단의 모기업은 현대아이파크, 현대산업개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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