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톡톡 튀는 ‘문자’ 한 방 위해, 팬들은 4시간을 준비한다

‘MVP 김상현, VIP 최희섭, 젊은P 안치홍’.
9월 15일 목동구장에서 벌어진 KIA와 히어로즈의 경기에 김동희(29)씨가 만들어 온 피켓이다. P자로 끝나는 재치 있는 응원문구를 만든 김씨는 “수비할 때 선수들이 보라고 만들었다. 피켓을 들고 응원하면 선수와 대화하고 소통하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피켓 응원, 야구장의 新소통법


팬들은 이제 박수만 치려 들지 않는다. 적극적으로 선수와 팀에 대한 사랑, 그리고 의견을 표시한다. 피켓은 그들의 선물이자 무기다.
요즘 경기장은 피켓의 물결이다.
“롯데, 삼성 비켜 이것들아, 히어로즈가 가을잔치 갈 거다” 같은 유행어 차용형과 “가을야구가 제일 쉬웠어요” 등의 촌철살인 피켓들도 눈에 띈다.

프로 스포츠에 피켓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

“서태지 오빠 사랑해요” “H.O.T. FOREVER”처럼 가수 콘서트장에서 시작된 피켓은 농구장의 오빠부대를 거쳐 축구장과 야구장으로 이어졌다. 특히 야구장에서 피켓 문화는 사랑 고백을 넘어 팬들이 주도하는 스포츠의 문화로 꽃을 피우고 있다.

한국야구위원회(KBO)는 피켓 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지난 9월 ‘센스 있는 응원 피켓 다 모여라’ 이벤트를 시작했다. 야구를 중계하는 김중석 KBS N스포츠 팀장은 “경기 사이사이에 관중의 피켓과 시청자 반응이 중계에 큰 도움이 된다. 관중이 참여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줘 기쁘다”고 말했다.

“4대 강 사업보다 중요한 4강”
제대로 된 피켓 하나 만드는 데는 3~4시간이 족히 걸린다. 기발한 문구를 짜내야 하고 종이를 오려 붙여야 한다. 비용도 만만치 않다. 즐기기 위해 찾는 야구장인데 숙제를 하듯 피켓을 만들어오는 이유는 뭘까.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과거 팬들은 할 말이 있어도 방법이 마땅찮았다. “나이스 빠따, 나이스 빠따, 이만수” 소리 지르는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공허한 외침으로 끝나기 일쑤였다.

최태원 KIA 타이거즈 코치는 “옛날에는 술병, 물병은 기본이고 족발이나 닭뼈, 담배, 라면국물이 쉴 새 없이 날아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팬들이 경기에 개입하고 싶은데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거 아니겠느냐”고 덧붙였다.

요즘 팬들은 피켓을 통해 자신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문자를 보내고 인터넷에 댓글을 달 듯 경기장에서도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야구장에서 만난 이보라(19)씨는 “히어로즈 선수들과 팬들이 이거 보고 힘내라는 마음에서 피켓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김누리(23)씨는 “KIA를 응원하는 마음을 겉으로 드러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야구장은 피켓 문화의 마지막 종착지다. 같은 야외 스포츠인 축구보다도 한참 늦었다. 불과 5~6년 전만 해도 야구장에서 피켓을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야구장의 ‘팬심’이 움직이기 시작한 이유는 뭘까. 방송 중계의 확대와 발전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많은 사람이 야구를 보다 쉽게 접할 수 있게 됐고 중계 기술이 향상되면서 그라운드 바깥까지 카메라의 시선이 닿았다. 관중석의 풍경이 중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커진 것이다. 야구는 투수가 공 하나를 던지고 끊어지기 때문에 경기 이외에도 많은 부분을 볼 수 있다. 관중의 표정과 행동은 야구 중계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다.

피켓의 등장과 대중화는 방송 중계 확대와 발전의 연장선에 있다. 카메라는 재미있는 피켓을 놓치지 않고 포착해 웃음을 주고 이야기를 끌어냈다. 피켓이 쉴 새 없이 전파를 타면서 기발한 문구들이 쏟아져 나왔다. 생산과 소비는 선순환을 이뤘다.

방송은 피켓 응원을 전달하는 장이자 통로다. 김 팀장은 “뚝 떨어진 선수와 관중석 사이에 방송이 끼어들어 다리를 놔줬다”고 표현했다. 시청자와 관중을 이어주는 끈 역시 방송이다. 방송이 인터넷과 결합해 피켓 문화를 재생산함으로써 아날로그 방식의 피켓은 디지털로 변환됐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는 재미있는 피켓 내용을 모아 놓기도 했다. 피켓 내용에도 댓글이 달렸다. 잘 만든 피켓 하나는 웬만한 경기 평가 글 이상으로 인기가 좋았다.

방송이 없었다면 피켓은 한번 써보지도 못하고 버리는 휴지 조각이었을지 모른다.
여성 팬의 증가가 피켓 문화 발전의 공신임도 부인할 수 없다. 승부에 집중하는 남성팬과 달리 많은 여성팬들은 선수에게 관심을 갖는다. 그것도 적극적이다. 사랑 고백형이 많았지만 여성의 경기 이해 수준이 높아지면서 피켓 문화의 수준을 올려놨다. 품을 들여 피켓을 만드는 데에 인색하지 않다. 간혹 남성들이 피켓을 들기도 하지만 보통 친구나 동호회 회원들과 함께 만든 것들이다.

피켓 문구는 변화를 거듭했다. 초기의 피켓은 승부에 집착했다. “이승엽 파이팅” “LG 이겨라” 등 팬들의 관심은 이기고 지는 데 국한됐다. 2000년대 들어서는 조금 바뀌었다. 소망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타격왕 홍성흔” “Why not 손시헌” 등은 승부를 떠나 팬들의 바람을 담았다. “순철아, 우리는 니가 부끄럽다” 등 시위성 피켓도 유행했다. 이런 피켓은 그 나름의 힘을 숨기고 있다. 응원하는 구단의 인사에 영향을 줄 만큼 파괴력을 발휘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현수야, 누나 집문서 가져왔다”
최근의 피켓은 개성이 넘쳐 흐른다. 비슷한 내용이 거의 없을 정도로 각양각색이다. 승리에 대한 염원과 선수에 대한 관심은 물론 울림 있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현수야, 누나 집문서 가져왔다”는 우스꽝스럽지만 간절하다. “선수가 포기하지 않으면 팬들도 포기하지 않는다”는 가슴 찡한 부탁이자 자기 다짐이다.

“4대 강 사업보다 중요한 게 4강 진출” “1992년 4살, 나도 우승 좀 보자” 등 피켓은 전에 없던 기발함과 재기 발랄함이 더해져 팬들을 울고 웃긴다.

안산정(32)씨는 “피켓은 무조건 튀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재미도, 감동도 없는 피켓은 존재 가치가 없다는 얘기다. 봐주는 사람이 없으면 피켓이 아니다.

야구가 대중화·전문화되면서 야구를 모르면 이해하기 힘든 문구도 점차 늘어났다. “회장님을 기억하고 싶어 사직서 내고 서울에서 왔습니다” 같은 피켓은 송진우(은퇴)를 모르는 신세대 팬이라면 감을 잡기 어렵다. 피켓은 복잡하면서 단순하고 재미있으면서 슬프다. 촌철살인의 묘미가 있고 중독성도 있다.

피켓은 방송을 매개체 삼아 개인이 다수를 향해 대형 문자를 보내는 것과 같다. 표현하고픈 욕구와 소통하고픈 바람이 작은 공간에 압축돼 있는 것이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개방·참여·공유를 바탕으로 하는 웹 2.0을 닮았다. 열린 공간에서 누구나 할 수 있고 함께 누릴 수 있다. 서로 나누니 즐거움이 배가된다. 피켓은 응원의 도구일 뿐 아니라 문구에서 팬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재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피켓 제작이 댓글 올리기라면 피켓 보기는 댓글 감상이다.

댓글에 댓글이 달리듯 피켓 하나만으로 상호 작용이 활발하게 이뤄진다. 피켓은 소통에 그치지 않는다. 야구와 관련된 대화와 화젯거리를 중개한다. 그것이 다시 스포츠가 되고 이야기로 엮인다.

이진형 KBO 홍보팀장은 “보는 TV에서 갖고 노는 TV로 발전했듯 야구도 마찬가지다. 팬 문화의 중심이 관전에서 소통으로 옮겨가고 있다. 지금은 응원문화 자체가 관심거리이자 목적”이라고 설명했다. 경기장에서 경기만 보는 것은 이제 구시대적인 발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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