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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가쟁명:유주열] 시중쉰(習仲勳)·시진핑(習近平) 父子 이야기

떠오르는 중국의 떠오르는 지도자 시진핑 국가부주석이 12월 16일 방한한다. 그가 2005년 7월 저장(浙江)성 당서기로 방한 이후 두 번째다. 우연히도 며칠 앞서 일본의 집권당 민주당정권의 일인자로 통하는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郎) 간사장도 방한했다.
장래 중국과 일본의 최고 지도자가 될 두 사람은 여러모로 비슷하다. 오자와 간사장은 국회의원이었던 아버지가 급서함에 따라 아버지의 선거구에서 보궐선거로 당선돼 국회의원의 뱃지를 단 일본 태자당 정치인이다. 시진핑 부주석도 전국인민대표대회의 상무부위원장(국회부의장)을 역임한 아버지 시중쉰를 둬 중국의 태자당으로 분류되지만 바깥 물정 잘 모르는 일반 도련님과 달랐다. 둥근 얼굴의 호남형이지만 알고 보면 아버지 시중쉰의 권력부침으로 유년시절부터 산전수전을 겪고 수많은 역경을 극복한 남다른 성공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
2002년 5월 22일 중국의 혁명원로 정치인 시중쉰이 마지막 숨을 거뒀다. 89세였다. 자신이 낳은 7남매 자녀 중 가장 총애했던 시진핑이 다행히 임종했다. 아버지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던 시진핑은 저장성 부서기로 마침 베이징 출장 중이었다.
산시(山西)성 푸핑(富平)현 농가에서 태어난 아버지 시중쉰은 13세 때 공청단에 가입 학생운동을 하였고 15세 때 공산당에 입당 산시북부 정치위원 류즈단(劉志丹)을 따라 서북지역의 농민운동을 지도하며 게릴라전을 펼쳤다. 시중쉰의 활약은 그를 류즈단 휘하의 가오강(高崗)에 이어 3인자에 오르게 했다. 마오쩌둥(毛澤東)의 長征 주력 홍군이 陝北에 도착하였을 때 이미 근거지를 마련해 놓은 류즈단은 마오쩌둥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오쩌둥은 유명한 시중쉰을 만나고 싶어 했다. 워낙 용맹하고 전공이 혁혁하여 나이 많은 노장군일 것으로 생각했던 마오쩌둥은 불과 22세의 청년장군 시중쉰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류즈단이 죽고 가오강은 동북으로 전출되자 시중쉰은 한동안 ‘서북의 왕’으로 불리었다. 그 후 마오쩌둥은 중앙정부의 저우언라이(周恩來) 류사오치(劉少奇) 세력을 견제하기위해 지방 영웅들을 北京으로 불러 올렸다. ‘동북의 왕’으로 불렸던 가오강과 함께 시중쉰도 北京생활을 시작하였다. 1953년 6월 北京에서 태어난 첫 아들이 시진핑이다. 시진핑의 핑(平)은 베이핑(北平)즉 北京에서 태어났다는 의미이다. 그의 손위 누나 安安은 西安에서 태어 나 붙여진 이름이다. 태어난 곳의 지명을 이름에 넣는 것은 당시 유행이었다. 류사오치의 부인 왕광메이(王光美)는 외교관인 아버지가 미국에서 낳은 딸이고 그의 오빠 왕광잉(王光英)은 영국에서 낳은 아들이다.
그러나 시중쉰의 첫부인에서 태어난 1남2녀 모두 핑(平)자돌림으로 된 것을 보면 핑이 그의 고향 부핑에서 유래되지 않았나하고 생각된다. 시중쉰이 40이 된 해에 태어난 시진핑은 둘째부인 치신(齊心)과 사이에서 태어난 2남2녀의 첫아들로 둘째 아들은 시위안핑(習遠平)으로 두 아들 모두 핑자 돌림이다.
시중쉰이 저우언라이의 총애를 받아 국무원 비서장등 고위직에 오르지만 1962년 소설 류즈단의 필화사건에 연류돼 반당분자로 몰려 허난성 노동자로 下放된다. 시중쉰이 문화혁명이 끝난 1977년 복권될 때까지 16년간 농촌생활을 하게되어 시진핑은 농촌에서 초등학교 중학교를 다니는 등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에 많은 고초를 겪는다. 시중쉰은 장기간 실각생활에도 자녀들에게 항상 자존심을 지키되 근검 절약 정신을 교육하였는데 자녀 중 시진핑이 가장 아버지의 기대를 이어 나갔다고 한다.
시진핑이 오랜 공직생활에서 가난한 사람을 찾아 격려하고 겸허하게 행동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를 좋아하게 되고, 항상 人和를 중시하라는 시중쉰의 교육으로 그와 함께 일한 사람은 그를 친화적인 상사로 기억하고 칭송하고 있다.
시중쉰이 복권해 광동성 서기로 있으면서 홍콩 마카오의 발전에 주목, 선전(深玔), 주하이(珠海)등에 경제특구 지정을 건의하여 실현시키는 등 개혁개방의 진정한 설계자였다고 한다. 1989년 천안문사태로 덩샤오핑(鄧小平)이 가장 어려운 정치적 상황에 처했을 때 시중쉰은 중국은 개혁개방론자 덩샤오핑을 필요로 한다는 신념으로 자신의 정치생명을 걸고 어느 누구보다 가장 먼저 덩을 지지하고 나서 덩의 실각을 막았다고 한다.
아버지 시중쉰의 엄격한 가정교육과 개혁개방만이 중국을 살릴 수 있다는 아버지의 신념을 이어 받은 시진핑 국가부주석의 방한은 한국 역시 짧은 기간동안 어려운 여건에서 근검절약과 개혁 개방정신으로 발전한 국가임을 제대로 평가 할 기회가 되고 장차 한중관계가 한층 더 업그레이드되는 기반을 마련 할 것으로 기대된다.


유주열 전 베이징총영사=yuzuyoul@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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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