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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금융허브, 신중하게 접근해야

글로벌 경제위기 이후 국제금융 판도에 지각변동이 일어날 조짐이 뚜렷해지고 있다. 최근 국제 금융가의 화제는 유럽 최대 은행인 HSBC의 행보다. 이 은행의 최고경영자(CEO)인 마이클 게이건은 내년 2월까지 자신의 집무실은 물론 거처까지 영국 런던에서 홍콩으로 옮기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런던의 헤드쿼터를 통째로 옮기는 방안까지 고민 중이라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그룹 본사를 런던으로 철수시킨 지 70여 년 만의 귀환이다. 물론 돈 때문이다. HSBC는 올 상반기 중국과 홍콩에서 전체 이익의 40%를 벌어들였다. 이 은행은 앞으로 아시아 지역의 영업 비중이 50% 이상을 차지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또 하나 눈길 끄는 장면은 유럽연합(EU)의 역내시장 담당 집행위원 자리가 50년 만에 물갈이된 것이다. 이 자리는 유럽의 무역과 시장정책, 금융규제와 감독 업무까지 총괄하는 핵심 요직이다. 줄곧 런던의 금융가 ‘시티’ 출신이 독식해왔다. 이 자리에 프랑스 출신인 미셸 바르니에가 발탁되자 난리가 났다. 그는 “헤지펀드나 사모펀드의 무분별한 행태는 단속해야 한다”며 시티를 향해 칼끝을 겨누고 있다. 이로 인해 느닷없이 반사이익을 누리는 도시가 취리히와 제네바다. 런던 금융가의 고급 인재들이 줄줄이 짐을 싸 EU의 규제를 받지 않는 스위스로 옮겨가고 있는 것이다.

통계를 통해 금융 판도의 변화를 느낄 수도 있다. 올 들어 중국 상하이 증시는 3000조원의 거래대금을 기록해 뉴욕 증권거래소와 나스닥에 이어 세계 3위로 올라섰다. 최근 발표된 세계금융센터지수(GFCI)를 보면 런던과 뉴욕이 여전히 세계 1, 2위의 금융허브를 고수했지만 그 위상은 예전 같지 않다. 3∼5위로 올라선 홍콩·싱가포르와 중국 선전의 맹추격을 받고 있다. 서울도 35위로 약진했을 만큼 아시아 지역의 부상은 눈부시다. 유럽에선 그나마 취리히와 제네바가 간신히 10위권에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 GFCI는 “홍콩·싱가포르·상하이·선전 등이 급부상해 세계 금융허브가 아시아로 옮겨가는 조짐”이라고 분석했다.

정말 반가운 현상이다. 이런 지각변동이 오랫동안 금융허브를 꿈꿔온 한국에 새로운 기회로 비칠 수 있다. 노무현 정부의 ‘동북아 금융허브’, 이명박 정부의 ‘금융중심지’ 정책이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전국의 지방자치단체들끼리 금융허브를 차지하기 위해 신경전이 한창이다. 그러나 금융허브를 겨냥한 경쟁에는 찜찜한 구석이 적지 않다. 금융허브가 치명적인 유혹일 수 있기 때문이다. 금융허브에 과욕을 부리다 무너진 두바이·아일랜드·아이슬란드의 실패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역사적으로도 모든 강대국은 제조대국으로 일어나 금융대국으로 막을 내렸다. 로마도, 해가 지지 않았던 영국도 같은 운명이었다. 그들의 강점이었던 농업이나 산업혁명의 효과가 사라지고, 금융과 소비가 경제의 중심이 되면서 초강대국 자리에서 멀어졌다.

최근 국내 곳곳에서 ‘금융허브’ 구호가 다시 요란해지고 있다. 그러나 인위적으로 금융 규제를 과도하게 완화하는 것은 위험하다. 이미 한국은 세계 6위의 금융 개방 국가다. 국제자금이 지나치게 자유롭게 드나드는 바람에 홍역을 치른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오히려 묵묵히 글로벌 경제위기를 헤쳐나가는 독일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남들처럼 요란한 비상경제조치를 취하지 않으면서, 탄탄한 제조업을 바탕으로 흔들림 없이 나아가고 있다. 금융이 실물을 지배하지 않고, 실물을 지원하는 데 그쳐야 한다는 교훈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금융은 실물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금융이 시장의 변동성을 크게 증폭시키는 경우는 흔했지만, 실물경제의 추세를 바꾼 적은 한 번도 없다. 금융허브에 대한 과도한 욕심은 독(毒)이 될 수 있다. 그림자는 그림자일 뿐이다.

이철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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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