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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칠한 천재를 만난 老대가 “작은 성취에 만족 말게나”

1. 율곡은 천재였다. 세 살 때 “말을 배우면서 글을 알았고,” 일곱 살 때는 사서삼경에 통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부럽기는 “애쓰지 않고도 학문이 날로 성취되었다”는 것. “숲 속 정자에 가을이 벌써 저무는데 / 끝없이 펼쳐지는 번다한 나그네의 상념 / 저 멀리 아득한 물, 푸른 하늘에 이어지고 / 서리맞은 단풍, 해를 향해 붉게 물들었네(林亭秋已晩, 騷客意無窮, 遠水連天碧, 霜楓向日紅).” 누가 이 시를 여덟 살 코흘리개의 작품이라 하겠는가. 뿐인가, 무슨 소설책을 읽듯, 그 어려운 한문책을 “한 눈에 10여 줄밖에” 못 읽는다고 겸양하여 주변을 좌절시켰다.

한형조 교수의 교과서 밖 조선 유학 : 퇴계와 율곡의 만남

그의 인생은 16살 때 찾아온 어머니의 죽음으로 전기를 맞는다. 조운을 맡은 아버지를 따라 나섰다가 위독하다는 소식에 부랴부랴 마포에 배를 대던 중이었다. 임종도 못한 회한에 삶의 허무와 의문이 겹쳐, 그는 3년상을 마치고 곧바로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선비들에게는 금기와 다름 없는 이 결행(決行)이 그를 두고두고 괴롭혔다. “머리를 깎았다”는 소문과, 아니 “상투를 풀어헤치니 발끝으로 흘러내리더라”는 반론들이 뒤섞였다. 산(山) 생활은 오래 가지 않았다. 1년 후 하산하며 지은 시와 자경문(自警文)에는 “나 이제 성인의 학문을 하겠다”는 포부를 굳건히 내비쳤다.


2. 뛰어난 재주에, 남다른 이력이 그를 소문의 한가운데 있게 했다. 도산에 은거하고 있던 퇴계도 이 젊은이를 보고 싶어 했다. 1558년 명종 13년 봄, 율곡은 성주의 장인을 만나고, 외가가 있는 강릉으로 가는 길에 퇴계를 예방했다. 율곡의 나이 23세, 퇴계는 학문이 원숙기에 들어선 58세 때의 일이다.

율곡은 퇴계를 향한 존경부터 표했다. “시내는 수사(洙泗)에서 갈라졌고, 봉우리는 무이(武夷)에 우뚝하십니다(溪分洙泗派, 峯秀武夷山).” 수사는 공맹이 활동하던 곳이고, 무이는 주자가 강학하던 곳이다. 즉, 퇴계의 학문이 공자를 이었고, 주자학을 탁월하게 성취하고 있다는 뜻을 담고 있다. “흉중은 비에 씻긴 달 같으시고, 웃고 얘기하면 미친 물결이 그칩니다(襟懷開霽月, 談笑止狂瀾).”

이렇게 퇴계의 풍모와 감화력을 찬탄한 다음, 율곡은 이 방문이 한가한 사교를 위해서가 아니라 “도(道)를 듣기 위한” 것이라고 토를 박아, 아연 퇴계를 긴장시켰다.
“율곡안하(栗谷眼下)에 무완인(無完人)”이라 했다. 『경연일기(經筵日記)』가 극명하게 보여주듯 그는 칭찬에 인색하고 비평에 신랄했다. 마음에 무엇을 담아두지 못하는 성격이었고, 그래서 구설도 많고 적도 많았다. “이 편지는 당신만 읽고 제발 태워버리십시오” 한 편지가 그 부탁까지 달고 세상에 유통되기도 했다. 그런 까칠하고 기준 높은 인물에게서 극찬을 받은 퇴계는 겸연쩍어하며 이렇게 화답했다. “병든 몸에 빗장 닫아걸어, 봄을 보지 못했더니 / 그대가 찾아와 내 마음을 신선하게 열어주네 / 역시 알겠군, 이름이 공연히 전하는 것이 아님을 / 몸가짐 변변히 못해온 내가 부끄럽구려(病我牢關不見春, 公來披할醒心神. 始知名下無虛士, 堪愧年前闕敬身).”

노대가는 한편 겸양하고, 한편 젊은이를 칭찬했다. 명불허전(名不虛傳), 과연 소문이 그냥 나는 법이 없다면서…. 한편 걱정도 되었다. 젊은이가 너무 똑똑했던 것이다. 퇴계는 젊은 율곡에게 삶의 성숙과 학문의 길은 멀고 멀다는 것, 자만하지 말고 노력하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알곡은 쭉정이가 익어가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먼지들은 깨끗한 거울을 두고 보지 못한다오. 지나친 시구들은 반드시 깎아내고, 각자 열심히 공부와 친할 일이네(嘉穀莫容<7A0A>熟美, 游塵不許鏡磨新. 過情詩語須刪去, 努力功夫各日親).”

3. 눈이 막혀 율곡은 이틀을 더 머물다 길을 나섰다. 떠나던 아침, 퇴계는 못내 그의 솜씨가 궁금했다. 율곡은 즉석에서 시 두 수를 바쳐올렸다. 퇴계는 제자인 조목에게 “참으로 후생가외(後生可畏)가 빈말이 아니었다”고 자신의 놀라움을 전달했다. 그는 이 젊은이가 나중 자신과 쌍벽을 이루리라는 것을 예감했는지도 모른다.
퇴계는 강릉에 가 있는 율곡에게 다시금 ‘이 학문’의 기대를 걸고 책임을 당부했다. “세간에 영재, 뛰어난 재주들이 어디 한둘이겠습니까. 그런데 도무지 ‘옛 학문(古學)’을 하려 들지를 않아요. 도도한 흙탕물처럼 세속의 가치에 떠밀려가고 있습니다. 이를 떨치고 벗어난 사람이 간혹 있기는 한데, 그릇이 안 되거나, 혹은 각성이 너무 늦습니다. 그대는 뛰어난 재주에, 나이 아직 어리니, 바른 길로 나서면 나중의 성취를 어찌 가늠하겠소. 다만 천만 더욱 원대(遠大)하기를 기약할 일이지, 작은 성취에 자족하지 마시오(世閒英才何限, 只爲不肯存心於古學, 滔滔盡然. 其有自拔於流俗者, 或才不逮, 或年已<665A>, 如君高才妙年, 發<8ED4>正路, 他日所就, 何可量哉. 惟千萬益以遠大自期, 勿以小得自足).”

이것이 둘의 첫 만남이다. 그런데 이 당부에 의아해할 사람이 많겠다. 퇴계는 지금 조선에 유학자들이 “거의 없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기실 퇴계는 자신 이전에 도학의 선배들을 꼽는데 주저했고, 율곡은 퇴계·남명 같은 당대의 거물조차 ‘이 학문’의 절반인 정치적 지식과 기술은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럼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조선이 500년 유학을 거의 경험한 적이 없고, 유학자들은 예외적 인간들이었다고….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고전한학과 철학을 가르치고 있으며『주희에서 정약용으로』『조선유학의 거장들』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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