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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를 만족시킨 두 ‘외교 영웅’

고려시대 외교관 서희의 동상이 지난 10월 9일 서울 서초동 외교안보연구원에 설치됐다.
산과 바다는 쉽게 만나지 않는다. 히말라야 산맥을 인도양이 덮쳐 드는 할리우드 미래 재난 영화의 한 장면이라면 모를까, 내륙에 우뚝 솟아난 산은 광활한 바다와 좀처럼 한자리에서 볼 수 없다.

함규진의 한국사를 움직인 만남 <4> 서희와 소손녕

하지만 어쩌다 산과 바다가 만나는 곳이 있다. 그럴 때면 이 위대한 자연의 거인들은 서로 다툴까? 그렇지 않다. 서로를 압도하지 않되 서로의 장점을 보완하고 그럼으로써 서로를 더욱 돋보이게 해준다. 그래서 보는 이에게 절로 경탄을 자아낸다.

사람들끼리도 산과 바다 같은 만남이 있다. 좀처럼 만나기 어려웠던, 서로 다른 배경과 관습과 논리를 가진 사람들의 만남. 하지만 충돌하지 않고, 서로 바라는 것을 충족시키고, 각자의 영역으로 당당하게 돌아가는 만남.

993년, 그런 만남이 지금의 평안북도 봉산군에서 있었다.

“마침내 우리가 이렇게 마주 앉게 되었군! ···그래, 항복하러 온 것이오, 땅을 바치러 온 것이오?”

“무슨 말인지 모르겠소. 우리는 항복하지 않소. 바칠 땅도 없소.”

“뭐요? 그럼 대체 뭘 하러 여기 왔단 말이오? 우리 대조(大朝)와 80만 천군(天君)을 우습게 보는 거요? 먼저 그대의 목부터 떨어뜨려야겠군!”

“하하하. 좋을 대로 하시오. 하지만 나는 이야기를 하러 여기 왔고, 귀공도 그러기 위해 거기 앉아 있을 것이오. 내 목이 떨어지면 내게서 무슨 이야기를 들으시려오? 귀공이 받드는 황제께서 그렇게 하라 하셨소?”

“···으음. 좋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우선 들어나 봅시다.”

서희는 살기등등한 거란군 진영 한복판에 들어가서도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그는 상대 장수인 소손녕이 거란 황제의 부마로서 중요한 외교 담판의 대표자가 되기에 충분함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거란군의 총사령관이되 도통(都統) 자격은 아님도 알고 있었다. 거란군의 편제에서 도통이 지휘하지 않는 군대는 6만을 넘지 않는다.

또한 적과 싸우되 적지를 점령하지는 않는다. 80만 대군 운운하지만 과장일 것이며,
전쟁 목적 역시 고려를 멸망시키거나 굴복시키는 것은 아니리라. 서희는 이런 계산을 깔고, 고려군 중군 사령관으로 한동안 소손녕과 대치하며 들은, 거란 측 주장을 치밀히 분석해 놓고 있었다.

“그대의 나라는 신라를 대신한 것 아니오? 그러면 북쪽 땅은 고려의 땅일 수 없소. 우리는 북쪽에서 일어났고, 옛 고구려 땅을 가질 자격이 있소. 그런데 그대 나라가 계속 침입해 들어오니, 우리가 어찌 좌시할 수 있겠소?”

“그것은 귀공의 오해요. 우리나라 이름을 공연히 고려라 했겠소? 우리야말로 고구려를 이어받은 나라지요. ‘옛 땅이므로 가질 자격이 있다’고 하면, 귀국의 수도인 동경 역시 우리 땅이 되어야 하지 않겠소?”

“···음! 그래서 지금 끝까지 우리와 맞서겠다는 것이오? 고려는 처음부터 우리를 야만이라 멸시하고 반목했소. 그대의 태조는 우리가 선사한 낙타를 다리에 묶어 놓고 굶겨 죽이지 않았소? 그리고 지금도 우리와 대적하는 송나라에 사대하고 있고 말이오!”

“만부교 사건은 우리의 실수였소. 그리고 귀국에 사대할 용의도 있음을 밝히오. 다만 알다시피 귀국과 우리나라는 염난수(압록강) 일대의 여진족 때문에 길이 막혀 있지 않소? 최근 귀국이 그 땅을 일시 점거했는데, 그 땅을 우리가 맡아 여진을 내쫓고 길을 튼다면 송나라와 끊고 귀국을 존중할 수 있을 것이오.”

이렇게 해서 봉산군에서 열린 서희-소손녕 회담은 우호적으로 끝났고, 고려는 거란에 사대의 예를 하는 대신 ‘강동6주’를 얻어 국토를 압록강까지 넓히게 되었다. 거란군의 압박에 밀려 “무조건 항복하느냐, 청천강 이북의 땅을 갈라 주고 화친하느냐”를 놓고 갑론을박을 벌이던 당시 고려 조정에서 “제3의 길”을 내세우고 거란과의 회담에 임한 서희. 그는 항복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땅을 떼주기는커녕 오히려 더 얻어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입을 모아 서희를 한국 사상 가장 위대한 외교관이라고 칭송을 아끼지 않는다.

서희의 공로는 당장 국토를 넓혔다는 데보다 고려가 거란의 침입을 장기적으로 방어할 거점을 마련했다는 데 있다. 고려가 일단 거란에 사대함으로써 수립된 힘의 균형은 1004년에 송나라가 거란에 굴복함으로써 깨어지며, 이후 거란은 영토 확장을 위해 고려를 거듭 침공한다. 그러나 강동6주에 설치한 요새들이 거란군의 발걸음을 붙잡았기에, 거란은 끝내 고려를 멸망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만약 993년에 청천강 이북을 떼어주고 화친했더라면 거란은 단숨에 개경을 유린하고 고려를 멸망시켰을 것이다.

그러면 소손녕은 기껏 대군을 끌고 와서 서희의 말솜씨에 놀아나고 만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당시 거란은 여진과 정안국을 잇따라 정벌하느라 지친 상태에서 다시 송나라와의 대결을 준비하며, 배후에서 고려가 공격해오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다(실제로 송나라가 고려에 협공 제의를 해왔으나 거절하기도 했다). 그래서 나중에 후금이 명나라 공격에 앞서 조선을 쳤던 것처럼 고려를 침공했던 것이다. 따라서 굳이 고려군과 사생결단을 벌이지 않고도 고려를 송나라에서 떼어 놓는다면 전쟁 목적은 달성하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거란군은 봉산군 전투에서는 이겼으나 안융진에서는 패했다. 그대로 전쟁을 계속하면 이길 수는 있을지 몰라도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주군이자 장인인 요 성종이 최근 정치적으로도 갈등을 겪고 있음을 생각할 때, 최단 시간에 목표를 달성하고 귀환할 수 있다면 그게 최선이다, 소손녕은 이렇게 판단했던 것이다.

외교의 요체는 상호 이익이 되는 지점을 파악하고, 상대를 설득해서 그 지점까지 손을 잡고 함께 가는 것이다. 힘만 믿고 얼러대거나 공허한 명분에만 집착하는 것은 외교라 할 수 없다. 서희도 소손녕도 그 점을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 그 뒤로 천년. 문명은 이를 데 없이 발전했다는데, 외교의 기술은 얼마나 나아졌을까? 오늘날 북한·중국·미국·일본의 틈에서 좀처럼 시원한 돌파구를 얻지 못하고 있는 대한민국에는 그들과 같은 혜안의 소유자들이 있는 걸까?




성균관대 정치학 박사로 현재 성균관대 부설 국가경영전략연구소 연구원으로 있다. 『정약용 정치사상의 재조명』『왕의 투쟁』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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