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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를 걷다, 어제를 만나다 ⑨ 대전

우리나라에서 다섯 번째로 큰 도시 대전. 하나 100년 전만 해도 대전은 지금처럼 사람 붐비는 동네가 아니었다. 드넓은 분지에 논과 밭이 널려 있어 ‘한밭’이라 불렸던 충청도의 조용한 농촌 마을이 현대적 의미의 도시로 거듭날 수 있던 건 오로지 기차 덕분이었다. 정확히 말해 1905년 1월 1일 경부선 철도 대전역이 개통하면서부터였다. 대전역이 들어서고 기차가 정차하면서 사람이 몰려들었고 물산이 넘쳐났다. 1917년 대전역 연간 이용객 수는 4만7000여 명이었지만, 1933년 연간 이용객 수는 열 배가 훌쩍 넘는 51만4600여 명이었다. 같은 기간 소화물 취급량은 15배나 늘어났다. 대전은 31년 면(面)에서 읍(邑)으로 승격했고 이듬해 공주에 있던 충남도청이 대전으로 이전했다. 새로운 도청 건물은 대전역에서 중앙로를 따라 1.5㎞쯤 떨어진 곳에 들어섰다. 지금도 대전역과 충남도청은 서로 마주보고 있다. 1931년 인구가 2만3284명이었던 대전은 올 1월 148만 명을 넘어섰다.



중앙일보·문화재청 공동 기획 ‘거리의 재발견’
기차역 생기며 시작된 역사, 시간은 가끔 거꾸로 흐르고…

도시 대전의 역사(歷史)는 오롯이 대전 역사(驛舍)에서 비롯됐던 것이다. 대전역이 들어선 지 105년이 됐다는 건 도시 대전의 나이가 105년이란 사실을 가리킨다. 대전 문화유산 답사모임 ‘한밭문화마당(cafe.daum.net/snd2003)’ 임헌기 대표의 안내로 대전역 주위를 한 바퀴 빙 돌았다. 기차역을 둘러싸고 100년 전 대전이, 그리고 10년 뒤 대전이 공존하고 있었다.



글ㆍ사진=손민호 기자








# 대전역 앞에서 - 대전발 0시50분



대전역 하면 떠오르는 옛 유행가가 있다. ‘잘 있어라 나는 간다 이별의 말도 없이 떠나가는 새벽 열차 대전발 0시50분…’. 1963년 개봉한 ‘대전발 0시50분’이란 영화에 삽입된 노래다. 이제 영화 줄거리를 기억하는 사람은 찾기 힘들어졌어도 구성진 노랫가락은 오늘도 대폿집 골목에서 흥얼거려지고 있다.



1959년 33호 완행열차는 전날 서울역에서 출발해 대전역에서 선 다음 이튿날 새벽 0시50분 종착역인 목포역을 향해 출발했다. 지금은 대전역에서 호남선을 탈 수 없지만 1960년대 초반까지 대전역은 경부선과 호남선의 분기역이었다. 이 노래는 실제로 자정을 넘긴 시각 대전역 플랫폼에서 목포행 열차를 앞에 두고 헤어지는 남녀를 보고 지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올 8월 14∼16일 대전역에서 ‘0시 축제’가 열렸다. 대전시가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지방 축제를 대전역에서 시작한 것도, 축제 이름을 하필이면 ‘0시’라 붙인 것도 다 그 옛 가요 때문이다. 대전의 역사는 대전역을 빼고선 설명할 수 없어서다.



오늘 대전역은 밤 0시50분 목포행 완행열차가 긴 기적 울리며 출발하지도 않고, 허겁지겁 들이마시는 가락국수도 팔지 않는다. 대신 오늘 대전역엔 높이 136.6m의 위용을 자랑하는 쌍둥이 빌딩이 있다. 떡 하니 버티고 서 있는 모습이 사뭇 위압적이다. 이 고층 빌딩의 정체는, 코레일(옛 한국철도공사) 본사와 한국철도시설공단이다. 올 9월 들어선 이 두 골리앗은 21세기 대전역의 새로운 랜드마크다.



하나 여기까지다. 대전역 주변은 여느 기차역과 다름없이 켜켜이 쌓인 세월의 흔적으로 복작거린다. 당장 대전역 광장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면 비좁은 골목이 보인다. 일제 강점기 때 인력거가 손님을 기다렸던 골목이다. 오래된 집에 낡은 간판이 위태로이 매달려 있고 거기엔 하나같이 여인숙이라 적혀 있다. 1970년대엔 사창가로 흥청거렸던 골목이란다. 지금은 대전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다. 건물 대부분이 한국전쟁이 끝나고 지어진 것이란다. 반세기 전 대전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많은 사람이 잊고 사는 역사 중 하나가 대전도 대한민국 수도였다는 사실이다. 한국전쟁 당시, 그러니까 50년 6월 27일부터 정확히 19일 동안 대전은 대한민국 임시수도였다. 충남도청사가 임시 정부청사로, 도지사 공관이 임시 청와대로 사용됐다.







# 대전역 뒤에서 - 시간이 느리게 간다



비좁은 골목 끄트머리 야트막한 굴다리가 눈에 들어온다. 정동 굴다리. 지금은 대전역 좌우로 대로가 뚫려 통행이 뜸해졌지만 1980년대만 해도 역 앞과 역 뒤를 잇는 유일한 통로였다. 어두컴컴한 굴다리 안으로 들어서니 잡동사니 파는 난전이 벽을 따라 바투 붙어 있다. 안경, 모자, 양말, 허리띠, 낡은 LP판 등 온갖 잡화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 하나 물건을 지키는 주인도 물건에 눈길을 두는 행인도 보이지 않는다.



굴다리가 끝나갈 즈음, 과일을 늘어놓고 앉아 있는 할머니 한 분을 만났다. 인사를 건네니 이내 환한 표정을 짓는다. 온종일 혼자 앉아 띄엄띄엄 지나는 사람만 구경하고 있었으니, 말벗이라도 궁금했던 모양이다. “과일 좀 사가. 오늘 하나도 못 팔았네.” 귤 몇 개 비닐 봉지에 넣으며 물으니, 할머니가 신이 나 고단했던 지난 세월을 들려준다. 할머니 이름은 신정례, 올해로 여든 살이다. 60년 세월을 대전역 근방에서 과일 장사를 했고, 한낮에도 빛 안 들어오는 동굴 같은 이곳에선 20년 넘도록 자리를 지켰다. 인적이 뜸한 요즘엔 하루 1만원어치도 팔기 힘들단다.



“그래도 내가 장사해서 네 남매 다 키웠다우. 두 아들은 대학도 보냈어.”



굴다리를 나오니 대전역 뒷동네다. 염색소 간판, 연탄 가게, 목욕탕 굴뚝의 모습이 영락없는 50년 전 풍경이다. 동네는 영 어수선한 모습이었다. 재개발을 앞두고 한창 철거가 진행 중이었다. 무너지고 부숴져 폐허가 된 집터 사이에 아직은 온전한 꼴을 갖춘 집이 듬성듬성 박혀 있었다.



후미진 골목을 따라 걸었더니 옛 철도 관사촌 안이다. 일제 강점기 때부터 기관사·역무사 등을 위해 지은 사옥이 모여 있는 동네다. 집 모양이 매우 특이하다. 언뜻 보면 한 채인데 꼼꼼히 보면 두 채다. 출입문은 따로 있지만 담장과 지붕이 하나다. 하나 한 지붕 아래서 집은 두 채로 쪼개진다. 그 사실을 증명해 보이려는 듯이 지붕에 얹은 기와와 담장의 색깔이 다르다.



대전역 뒤편엔 근대문화유산 두 점이 있다. 하나는 한전 대전보급소. 기차에 공급하는 전기를 생산하기 위해 세운 벽돌건물이다. 다른 하나는 철도청 대전지역사무소 재무과 보급창고 3호. 기차역에서 쓰던 온갖 자재를 담아두었던 목재 창고다. 창고 너머로 웃자란 쌍둥이 빌딩이 보인다. 어느 상징주의 회화 모양 낯선 풍경이다.



# 다시 역 앞에서 - 중앙로 그리고 중앙시장



기차역을 빙 돌아 나와 다시 역 앞에 섰다. 걸음을 중앙시장 안으로 옮긴다. 시장 골목을 걸으면 늘 유쾌하다. 딱히 살 마음이 없어도 굳이 값을 묻고 흥정을 붙여 본다. 전 세계 어디에서도 통하는, 시장 구경 요령이다.



말하자면 중앙시장도 일제의 잔재다. 대전역이 들어서고 일본인은 대전역 정면 방향으로 널찍한 신작로를 낸다. 일본말로 ‘혼마치(本町通)’, 지금 이름은 중앙로다. 일본인은 우리나라 주요 도시에 혼마치를 냈다. 서울·부산·인천·대구·광주에도 혼마치가 있었다. 그 혼마치를 중심으로 도시마다 대규모 상권이 들어섰다. 은행과 상점, 술집과 식당으로 전국의 혼마치는 늘 혼잡했다. 대전이라고 다를 게 없었다. 혼마치 양 옆에 시장이 섰고, 중앙로를 끼고 있는 시장이어서 중앙시장이라 불렸다.



대전 중앙시장의 전성기는 한국전쟁 직후다. 중부지방의 물류기지 역할까지 담당했을 만큼 중앙시장은 급성장했다. 물건만 넘치는 게 아니었다. 그때 대전엔 이북에서 피란 내려온 사람이 수두룩했다. 딱히 할 게 없던 그들이 시장에 나와 좌판을 벌였다. 지금은 많이 오그라들었다지만, 중앙시장은 여전히 여느 상설시장보다 널찍하다.



시장통을 벗어나와 역전 거리를 걷는다. 이 바쁘고 화려한 역전 번화가에 근대문화유산 세 점이 숨어 있다. 구 산업은행 대전지점과 조흥은행 대전지점, 그리고 구 동양척식주식회사 대전지점. 앞의 것 두 개는 50년이 넘는 은행 건물이고, 나머지 하나는 100년이 다 된 일제 때 건물이다.



현재 이 세 문화재는 모두 부분 개조돼 각기 다른 영업장으로 쓰이고 있다. 놀랐던 건, 옛 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이다. 일제의 약탈을 지휘했던 이 건물에 하필이면 마사지 업소가 들어가 있었다. 등록문화재의 경우 주인이 문화재 일부를 뜯어 고치거나 상업적으로 이용해도 법적으로 문제가 없단다. 그래도 씁쓸한 기분은 떨치기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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