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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오늘] 좌익의 정략에 이용된 희생양, 몽양 여운형

휘문고교에서 해방 제일성을 터트린 여운형(1886~1947). 한 신문기자는 그의 풍모를 이렇게 묘사했다. “연단에 올라선 여운형씨는 첫째 그 풍채가 온 청중의 신임을 모았다. 육척장신의 완강한 체구. 게다가 카이저 수염. 커다란 눈. 좌우로 활활 벗어나간 두 귀. 시원스럽게 벗어 오른 면적 넓은 이마. 첫인상에 그야말로 위장부(偉丈夫)란 든든한 감명을 받는다.”
여운형은 민족을 위한 길이라면 자기 한 몸의 안위는 돌보지 않은 당대의 호걸이었다. “범의 굴에 가야 범을 잡을 게 아닌가. 설사 내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대도 조선의 독립의지를 만천하에 천명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다.” 1919년 11월 일제는 상하이 임시정부 탄생의 산파 역할을 한 그를 회유하기 위해 제국의 심장 도쿄로 불러들였다. 데이코쿠(帝國) 호텔에 모인 각국의 신문기자들과 일본 정계 주요 인사들 앞에서 그는 당당하게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1921년 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노동자대회’에 참석한 이후 그는 소련을 우리 독립을 돕는 우군으로 바라보았다. 그가 고려공산당에 들어간 것도 레닌이 200만원의 거금을 독립운동자금으로 지원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서구 어느 나라도 우리 독립운동을 지원하지 않았던 그때. 그는 레닌이 제3세계 공산화를 위해 구사한 민족주의운동 지지 노선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해방된 오늘, 지주와 지본가만으로 나라를 세우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디 손을 들어 보시오. 지식인, 사무원, 소시민만으로 나라를 세우자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역시 손을 들어 보시오. 농민, 노동자만으로 나라를 세우자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손을 들어 보시오. 손을 드는 사람이 하나도 없군요. 그렇습니다. 일제 통치 기간 우리 민족에게 씻을 수 없는 반역적 죄악을 저지른 극소수 반동들을 제외하고 우리는 다 같이 손을 잡고 건국사업에 매진해야 합니다.” 1945년 11월 11일 조선인민당 창당식에서 밝힌 그의 생각은 민족주의 기치 아래의 대동단결이었고, 민주주의적 방법을 통한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이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의 그날 그는 해방된 조국이 소련군의 지배하에 놓일 것이라 오판했다. 미군이 진주한 이후에도 그는 잘못 끼운 첫 단추를 풀지 않았다. 건국준비위원회의 위원장(45년 8월), 조선인민당 당수(45년 11월), 좌우합작위원회 좌측 대표(46년 7월), 근로인민당 위원장(47년 5월).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흉탄에 맞아 숨을 거두기까지 그는 좌익의 간판 인물로 활동하며 공산당을 포함한 좌익과 온건우파의 합작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스탈린 치하의 소련은 그가 믿던 이상적인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었으며, 주변의 좌익도 이상을 꿈꾸는 낭만적 사회주의자가 아니었다. 좌우의 대립이 극심했던 해방정국에서 사회주의와 민족주의가 상호 협조적인 것이지 갈등을 가져오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그는 좌익의 정략에 이용된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었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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