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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의 길 대권의 길, 세종시에서 교차하다

6일 오후 4시20분 국회 본회의장.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가 대정부 질문이 열리던 회의장을 나와 현관으로 향했다. 그러자 기자들이 그에게 다가갔다. 박 전 대표는 기자들에게 “하루 종일 기다리시네요”라며 인사를 건넸다. 그는 세종시 문제에 대해선 별말 없이 승용차에 올라 탔다. 세종시 수정 문제를 놓고 이명박 대통령과 대충돌하는 길로 가는 그의 표정은 담담했다. 박 전 대표는 이날 본회의장에서 경선 기간이었던 2007년 9월 12일 당 대변인실이 언론인·당원에게 배포한 ‘이명박 후보의 행정중심복합도시 방문 주요 내용’이란 제목의 보도자료를 검토했다.

5~6일 열린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한나라당 친이·친박계는 격돌했다. 친이계인 정태근 의원은 “세종시 여야 합의 당시 박 전 대표를 비롯한 당 지도부는 원칙을 버리고 열린우리당과 협상해 12부4처2청이라는 여야 합의를 이루고 의원총회를 개최했다”고 말했다. 이은재 의원도 “세종시는 충청권 표심을 겨냥한 포퓰리즘의 산물”이라며 “이 대통령이 대선에서 ‘원안대로 해야 한다’고 약속한 적이 있느냐”고 했다.

친박계도 가만있지 않았다. 조원진 의원은 “여야 합의로 만든 법에 따라 벌써 5조4000억원의 국비를 들여 40%나 공사가 진행 중인 국책사업을 뒤집는다면 국민이 앞으로 어떻게 정부 정책을 믿고 따르겠느냐”고 했다. 구상찬 의원은 전방 철책 절단 사고 등을 거론하며 “총리는 군대를 안 가지 않았느냐”고 정운찬 총리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박 전 대표는 본회의장을 나서며 정부의 세종시 입장을 비판한 조원진 의원에게 “참 준비를 많이 했더라. 수고했다”고 격려했다.

국회에서는 대개 여당과 야당이 충돌한다. 대정부 질문에서 여당 내 분란이 표출되는 것은 이례적이다. 친박 의원들이 이 대통령를, 친이 의원들은 박 전 대표를 겨냥한 발언을 주저 없이 할 정도로 여당의 갈등이 폭발한 건 역대 여당에선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일이다.

이 대통령과 박 전 대표는 퇴로가 없는 길에 서서 대치하는 모양새를 연출하고 있다. 이 대통령은 “(세종시 원안 추진은) 양심상 어렵다”고 했다. 그는 지난 4일 정운찬 총리를 만나 “적절한 시점에 국민에게 입장을 직접 밝히겠다”고도 했다. 이 대통령의 소신으로는 수정이 불가피하며 해결이 안 될 경우 직접 전면에 나서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박 전 대표 역시 단호하다. 박 전 대표는 “양심상 원안대로 추진할 수 없는 거라면 아무리 (선거 때) 표가 급해도 국민 앞에서 (원안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맞서고 있다.

이 대통령은 ‘책임의 정치’를, 박 전 대통령은 ‘신뢰의 정치’를 앞세우며 힘겨루기를 하는 형국이다. 각각 ‘책임’과 ‘신뢰’를 내세운 두 사람이 쉽게 물러설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세종시의 향후 운명이 어떻게 결정되느냐에 따라 엄청난 영향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이 세종시 수정을 관철하지 못할 경우 그의 국정 운영은 흔들릴 가능성이 있다. 박 전 대표의 경우 원안+α론이 무산되면 차기 대선에서 청와대로 가는 길이 험난해질 수 있다.

2007년 당 대통령 후보 경선 때 치열하게 치고받았던 두 사람이 정치적 명운이 걸릴 수도 있는 세종시 문제를 놓고 이렇게 충돌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친박계 핵심 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박 전 대표가 세종시 수정에 반대하는 사실을 이 대통령과 청와대는 잘 알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이 대통령은 정운찬 총리를 지명한 다음 세종시 수정을 밀어붙였다. 구체적인 대안도 내놓지 않고 여론몰이를 하면서 당과 대통령 본인이 약속했던 걸 뒤집으려 하고 있다. 이는 행복도시법을 통과시켰던 박 전 대표를 압박하는 것 아니냐.”

다른 친박 의원은 “청와대와 총리실이 세종시 수정 논란에 불을 붙이는 것은 10·28 재·보선 패배, 4대 강 사업 추진, 남북 정상회담 접촉 논란 등 부담스러운 이슈를 잠재우면서 박 전 대표의 힘은 빼놓겠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친박계가 이런 인식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동안 다소 느슨한 대열을 형성하고 있던 친박 진영은 급속히 결집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친이계가 전면전을 걸어 온다면 정면으로 대응할 태세라는 게 친박 의원들의 얘기다.

친이계에선 강경론과 온건론이 혼재한다. 정두언 의원은 7일 “세종시 수정 좌절로 발생할 문제에 대해서는 박 전 대표가 책임져야 할 것”이라며 “만약 좌절된다면 박 전 대표 역시 엄청난 어려움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소장파 친이 의원은 박 전 대표도 충청권을 확보하기 위해 대권 승부수를 띄운 것 아니냐”며 “이제는 박 전 대표와 결연하게 싸울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러나 다른 친이계 의원은 “박 전대표를 겨냥하고 세종시 수정을 밀어붙인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 이 대통령의 생각이 확고한 것은 맞지만 정 총리가 대안도 없이 세종시 수정론을 들고 나와 문제를 키웠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당 내부에서 싸우는 게 능사가 아니다”라며 “정부는 제대로 된 안을 빨리 만들어 충청도민과 국민들의 판단을 구해야 한다”고 했다.

‘책임의 정치’와 ‘신뢰의 정치’ 충돌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미지수다. 당장 정부가 검토 중인 세종시 수정안이 법을 개정하는 형태로 제시되면 그것이 국회를 통과할 수 있을 것인지 불투명하다. 민주당·자유선진당 등이 수정안에 반대하고 친박까지 가세하면 의원 수는 전체의 절반이 넘는다. 이 대통령과 정 총리 등이 박 전 대표를 설득하지 못할 경우 세종시 관련법이 개정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하지만 청와대 한 관계자는 “정부가 세종시 대안을 잘 만들면 충청도에서 찬성 여론이 높아질 것”이라며 “그런 상황이 오면 국회에서 처리가 가능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최근 세종시에 입주할 기업이나 대학에 대해 적극 지원하겠다며 여러 방안을 모색하고 있는 건 이런 판단에서다. 여권 내의 분열은 어떤 결과든 6개월 남짓 남은 지방선거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1998년 내각제를 약속하고 출범한 김대중-김종필(DJP) 연합 정부가 결국 내각제 약속 이행 여부를 놓고 분열하면서 2000년 총선에서 야당에 패배한 예가 있다.

이 대통령과 박 전 대표는 2007년 경선에서 얼굴을 붉히며 싸웠다. 이 대통령이 취임한 직후 실시된 2008년 4월 총선과 관련한 공천을 놓고서도 두 사람은 충돌했다. 2008년 5월 둘은 청와대에서 110분간 만났다. 하지만 회동 후 서로 나눈 대화에 대한 진술이 엇갈리면서 사이는 더 틀어졌다. ‘화성남 이명박, 금성녀 박근혜’란 말은 그래서 나왔다. 올 9월 박 전 대표는 이 대통령의 부탁을 받아들여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유럽에 다녀왔다. 직후 둘은 다시 만났다. 43분간의 독대 분위기는 그런대로 좋았다. 둘 사이에 화해 기류가 흐른다는 관측도 나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세종시 문제를 놓고 두 사람은 다시 격돌하고 있다. 여기엔 차기 대권 문제까지 얽혀 있기 때문에 충돌로 인한 파열음은 어느 때보다도 클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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