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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新지식서 철학까지, 현재의 이슈 발 빠르게 낚아챈다

서울 교보문고 광화문점에 설치된 문고용 서가. 단행본 보다 작은 문고본의 진열을 위해 출판사들은 전용 서가를 마련해 대형서점에 비치하 고 있다. 신동연 기자
‘열 다섯 살,/ 하면 금세 떠오르는 삼중당 문고/ 150원 했던 삼중당 문고/ 수업시간에 선생님 몰래, 두터운 교과서 사이에 끼워 읽었던 삼중당 문고/ 특히 수학시간마다 꺼내 읽은 아슬한 삼중당 문고/ 위장병에 걸려 1년간 휴학할 때 암포젤 엠을 먹으며 읽은 삼중당 문고/ 개미가 사과 껍질에 들러 붙듯 천천히 핥아 먹은 삼중당 문고… 깨알같이 작은 활자의 삼중당 문고/ 검은 중학교 교복 호주머니에 꼭 들어맞던 삼중당 문고’(장정일 시 ‘삼중당 문고’ 중에서)

‘삼중당의 추억’은 잊어라, 문고판이 달라졌다

책 많이 읽는 것으로도 이름난 작가 장정일씨. 올 6월부터 그는 매달 한 차례 서울 동대문구 정보화도서관에서 ‘문고 읽기’라는 모임을 진행하고 있다. 이름 그대로 문고본, 즉 단행본보다 작고 저렴하게 출간된 책 중 한 권을 읽고 토론하는 자리다. 문고본으로 토론할 주제가 얼마나 넓을까 싶기도 한데, 그동안 다뤄온 내용을 들어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고령화 사회의 문제, 여론조사의 허와 실, 탈이념을 지향하는 영국 정치, 미국의 총기문화 등 무게는 물론 시사성까지 갖췄다. 달리 말하면 이런 동시대의 관심사가 문고로 출간돼 있다는 얘기다. 1970년대 전성기를 누렸던 과거의 문고들이 동서양의 고전이나 문학 작품 위주였던 것과 크게 다르다.

지난달 말 열린 모임도 그랬다. 10월에 선정된 책은 『가족이야기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해방 이후 우리 문학에 그려진 가족상의 변화를 다룬 내용이다. 참석자들은 이를 바탕으로 최근 달라진 결혼·가족·모성에 대한 의견을 나눴다. 모임 직후 따로 만난 장정일씨는 “요즘 문고가 다루는 주제가 얼마나 다채로운지 모른다”고 말했다. 사실 그의 문고 예찬론은 낯이 익다. 글머리에 인용한 ‘삼중당 문고’는 80년대 말에 나온 그의 첫 시집에 실려있는 시다. 10대 이후 성장기에 겪은 크고 작은 사건, 그런 와중에도 문고를 통해 늘 독서에 빠져들었던 자전적 경험을 담은 내용이다. 물론 지금 그가 문고의 효용을 강조하는 건 과거에 대한 향수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요즘 문고는 지금·여기의 이야기를 날렵하게 풀어낸다”는 말로 예전과 다른 문고의 장점을 표현했다.

요즘 문고, 더 정확히 말해 2000년대 들어 새로 등장한 문고들은 지금의 우리 사회와 접점이 뚜렷한 것이 특징이다. 과거의 문고와 달리 인문학을 비롯한 학문적 지식 위주, 그것도 고전·번역물 등 기존 콘텐트가 아니라 주제 선정·필자 발굴 등 기획력을 발휘해 새로 만든 콘텐트다. 과거의 문고와 구분하자면 지식형 문고나 기획형 문고쯤으로 부를 만하다. 각각 100여 종인 ‘책세상 문고’와 ‘SERI 에세이’, 370여 종이 나와 있는 ‘살림지식총서’ 등이 대표적이다.

독서 틈새시장 공략
책세상문고의 스테디셀러인 『파놉티콘-정보사회 정보감옥』은 이들 문고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예다. 21세기 디지털 감시사회를 논할 때마다 단골로 등장하는 이론을 다룬 책이다. 18세기 영국의 자유주의 철학자 제러미 벤담이 파놉티콘(panopticon)이라는 새로운 감옥의 형태를 어떻게 구상했는지, 20세기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가 이를 어떻게 재조명했는지, 그리고 국내 저자가 최근에 쓴 글인 만큼 이런 이론이 지금의 우리 사회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두루 실려 있다. 각각의 원전을 읽을 여유가 없는 독자에게, 혹은 이를 읽기 전에 길잡이를 원하는 독자에게 편리하고 요긴한 구성이다. SERI 에세이의 『CEO징기스칸』도 고전적 소재를 현대적 맥락에서 풀어내 인기를 끈 책이다. 살림지식총서에서 많이 팔린 『색채의 상징, 색채의 심리』『커피 이야기』『법의학의 세계』『이슬람 문화』 등은 비교적 최근에 대중적 관심사로 떠오른 틈새·이색 분야를 다뤘다. 최근의 관심사라는 점에서 살림지식총서는 글쓰기 등 실용지식으로도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2000년대에 새로 등장한 문고 중에는 아예 생활밀착형 실용지식을 전면에 내세운 것도 있다. 총 100권으로 완간된 김영사의 ‘잘 먹고 잘 사는 법’이 이런 경우다. 새로운 트렌드를 반영하려는 것은 80년대 말부터 장수하고 있는 대원사의 ‘빛깔있는 책들’도 예외가 아니다. 이 문고는 본래 전통문화 등 ‘우리 것’을 사진과 함께 다뤄 명성을 얻어왔는데, 2000년대 초부터는 현대적인 주제까지 범위를 넓혔다. 대원사 황병욱 차장은 “최근에는 와인·커피 등을 다룬 신간이 잘 나가는 편”이라고 전한다.

크기·분량도 다양해져
이들 문고는 형태도 과거와 달라졌다. 예전의 문고가 손바닥만 한 문고판, 이보다 세로로 긴 신서판 등 정해진 규격 위주였던 반면 요즘 문고는 이보다는 넉넉하고 다양한 크기다. 그 대신 작은 분량, 그리고 작은 주제가 또 다른 특징이다. 책세상문고·SERI 에세이 등은 책 한 권이 200자 원고지로는 500~800장 정도로, 보통 단행본의 60% 분량이다. 살림지식총서는 더 얇다. 책 한 권이 200자 원고지 300장 정도로, 100쪽 이내다. 마음만 먹으면 한두 시간 안에도 독파할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반면 책에 따라서는 내용이 빈약하다거나 수박 겉핥기라는 말을 듣기도 쉬운 조건이다. 살림출판사 이기선 팀장은 “그래서 가능하면 세밀하게 주제를 잡고 전공자에서 필자를 찾곤 한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미국’이라는 거시적 주제라면 미국 사회의 특징을 10가지 코드로 요약하는 『미국의 정체성』, 이념적 스펙트럼을 짚어보는 『미국의 좌파와 우파』, 할리우드 영화의 사례를 인용하는 『영화로 보는 미국』 등으로 접근하는 식이다. 분량이 적은 만큼 민첩한 점도 있다.

이기선 팀장은 2004년 살림지식총서로 나온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을 두고 “중국의 동북공정이 이슈가 될 당시 발빠르게 펴내 좋은 반응을 얻었다”고 소개했다.

2000년대 이후 새로 등장한 이들 문고의 특징을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한기호 소장은 “내용 면에서는 일본의 신서(新書)에 가깝다”고 지적했다. 신서는 문고판과 엇비슷하게 작고 저렴한 책이되, 시의적인 주제를 다루는 것이 특징이다. 진작부터 꾸준히 발간돼온 일본의 신서는 특히 2000년대 중반을 전후로 『바보의 벽』 『국가의 품격』 등 수백만 부가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탄생해 그 위력이 새삼 주목을 받고 있다. 신서의 분량은 200자 원고지로 500장쯤으로 알려져 있다. 분량이 적은 책도 폭발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탁석산씨는 문고가 배출한 스타
워낙 시장 규모가 달라 이를 국내와 비교하기는 무리다. 국내의 새로운 문고들은 저마다 잘 팔린 책이라고 해도 5만 부 안팎이다. 이런 판매량 자체도 인문학 책으로는 상당한 수준이다. 물론 최근 2, 3년 새 출판계 불황의 여파에서 이들 문고도 자유롭지는 않다. 발간 초기에 비하면 연간 펴내는 종수가 좀 줄어든 것도 그렇다. 출판사 책세상의 김미정 과장은 “그래도 문고는 찾는 독자가 꾸준한 편”이라고 말한다. 시리즈라는 성격을 살려 주요 문고마다 지금까지 출간된 책들이 절판되지 않고 계속 유통 중인 것도 장점이다. 단행본은 판매가 부진하면 2, 3년 만에도 서점에서 구하기 힘들어지는 것과는 다르다.

국내에서 새로운 필자를 발굴해 온 것은 이들 문고들의 주요한 기능으로 꼽힌다. 책세상의 김광식 주간은 “책세상문고를 처음 기획할 때부터 신진 연구자들이 예각화된 주제에 자신의 시각을 담도록 하는 데 중점을 둬 왔다”면서 “문고의 상당수가 각 저자의 첫 책”이라고 말했다. 문고로 처음 책을 낸 뒤 다른 출판사에서 단행본을 내게 된 저자가 꽤 된다는 얘기다. 방송진행자로도 활동한 철학자 탁석산씨 역시 이런 경우다. 지금까지 약 10권의 단행본을 펴낸 그가 주목을 받기 시작한 건 2000년에 펴낸 『한국의 정체성』을 통해서다. 책세상문고 제1권으로 나온 이 철학서는 곧이어 제6권으로 나온 『한국의 주체성』과 합쳐 10만 부 넘게 팔렸다.

탁석산씨는 “2000부(인문학 책이 보통 1쇄를 찍는 분량)를 기대하고 펴낸 책이 이렇게 호응을 받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면서 “넉넉지는 않더라도 책을 쓰는 일로 생활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된 계기였다”고 돌이킨다. 그는 “박사학위를 받은 전공자라도 책의 저자로 데뷔하기는 쉽지 않다”면서 “그런 점에서 문고는 처음부터 단행본에 도전하는 대신 자신의 글쓰기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말했다. 장정일씨는 문고의 이런 기능을 두고 “지식 사회에서 신춘문예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그는 “문고를 더 활성화하려면 이른바 스타급 저자들도 문고로 책을 내는 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같은 얘기지만 과거에는 국내에서도 문고로 밀리언셀러가 탄생하기도 했다. 70년대 중반 범우문고 제2권으로 나온 법정 스님의 『무소유』가 이런 예다. 범우출판사 김영석 실장은 “『무소유』는 문고로 큰 인기를 끌어 나중에 양장본으로 나온 경우”라면서 “문고본으로 팔린 것만 200만 부가 넘는다”고 말했다. 범우문고는 고전과 문학 등을 위주로 지금도 260여 종을 넘어 계속 출간되고 있는 문고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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