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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The Open’의 고향 영광의 흔적 고스란히 간직

코스에서 바라본 프레스트윅의 클럽 하우스. 바로 왼쪽에 기차역이 보인다. 철도 때문에 클럽은 확장을 못했고 오픈 챔피언십 개최지에서 제외됐다.
한 여인은 골프에 미쳐 가사를 돌보지 않는 무심한 남편의 코를 물어 뜯어 고양이에게 줬다.
한 골퍼는 급사한 동반자의 시체를 클럽하우스까지 짊어지고 왔다. 선행을 칭찬하자 그는 “샷을 할 때마다 시체를 내려 놓고, 다시 어깨에 들쳐 메느라 고생했다”고 말했다.

150년 전쯤의 얘기들이다. 실제로 있었던 사실인지, 과장된 얘기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골프의 특성이 150년간 변하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하다. 동반자(특히 부인)가 죽어도 자신의 라운드는 끝마치고 만다는 얘기는 현대 골프 유머의 단골 레퍼토리 중 하나다.

1860년 디 오픈 원년 대회가 열렸음을 알리는 티오프 기념비. 1번 홀은 거리가 578야드나 됐다.
스코틀랜드 동해안의 몇몇 도시에서 번창하던 골프는 19세기 중반 영국 전체로 퍼지기 시작했다. 전래 놀이가 스포츠가 되기 위해선 공통된 룰과 최고를 가리는 챔피언십이 필요하다. 스코틀랜드 서부 해안도시 프레스트윅이 1860년 최초의 골프 대회인 오픈(브리티시 오픈) 챔피언십을 만들면서 그 문제를 해결했다.

프레스트윅은 로열 트룬 골프장과 담장을 맞대고 있다. 나는 트룬과의 전투(라운드)에서 참패한 데다 허기가 진 패잔병 신세로 ‘오픈의 고향’ 프레스트윅 링크스에 발을 디뎠다.

링크스의 세크러터리 이언은 차가워 보였지만 비교적 나를 따뜻하게 맞아줬다. 초로의 신사는 먼 나라에서 프레스트윅의 역사를 찾아온 나의 모습에 뿌듯해하는 눈치였다. 그는 전통에 대한 신념으로 충만했고 코스의 수호자라는 자부심도 보였다. 영화 ‘남아 있는 나날들’에서 앤서니 홉킨스가 연기한 집사와 같은 분위기였다.

오픈 챔피언십이 시작될 무렵 캐디들은 몇몇 귀족에 ‘느림보 경’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이른바 ‘알까기’를 위해 바지에 구멍을 뚫어 놓은 골퍼를 안주 삼아 위스키도 마셨다. 요즘 한국의 캐디들도 동료들과 소주를 마실 때면 비슷한 얘기를 할 것이다.

황당한 얘기도 있다. 신발 밑창을 여닫을 수 있게 개조한 사람들이 링크스에 출몰했다는 거다. 공을 몰래 줍기 위해서였다. 당시 골프 볼 ‘페더리’가 매우 비싸 생긴 현상이다. 돌처럼 딱딱하고 완벽한 구형(球形)이 될 때까지 거위 털을 소가죽에 우겨 넣어야 했기 때문에 페더리 제작은 어렵고 위험했다. 가격은 2실링 6펜스로 드라이버와 비슷했다.
프레스트윅이 주도권을 잡은 것은 공 때문이다. 세인트 앤드루스엔 무적의 골퍼 앨런 로버트슨이 있었다. 그는 그린 키퍼 겸 캐디 겸 클럽·볼 제조업자 겸 골프 매치에 나가기만 하면 돈을 따는 프로 골퍼였다. 주 수입은 페더리였는데 새로 발명된 볼, 거타퍼차에 위협을 느꼈다.

말레이시아산 고무로 만든 거타퍼차는 싸고 오래 썼다. 로버트슨은 “남쪽(잉글랜드)에서 오는 모든 것은 죄악”이라면서 마녀사냥에서 그러던 것처럼 거타퍼차에 화형식을 했다.
그의 수석 도제 톰 모리스는 공을 잃어버려 어쩔 수 없이 거타퍼차를 쓴 일이 생겼다. 로버트슨이 목격했다. 모리스는 쫓겨났다. 실직자가 된 모리스를 프레스트윅에서 불렀다. 클럽은 모리스에게 코스를 만들게 하고 그를 자랑하기 위해 대회도 개최했다.

프레스트윅은 1851년에 만들었다. 1번 홀은 578야드(파 6)였다. 요즘 ‘세계 최장’ 운운하면서 1000야드가 넘는 홀을 만드는 골프장들이 있는데 이 홀이 그 거리 경쟁의 효시다. 이언은 오픈 챔피언십의 첫 티오프를 한 1번 티잉 그라운드(현재는 공터)의 기념비에 나를 데려 가 “이런 위대한 홀을 158년 전에 설계한 것이 상상이 가느냐”고 물었다.

“상상할 수 없고 정말 놀랍다”고 나는 맞장구를 쳤다. 사실 그리 대단치 않아 보이기도 했는데 이언의 표정이 너무 진지해, 솔직히 말하면 코스 밖으로 쫓겨날 것 같아서였다.

‘578야드 1풋(foot) 2인치’라는 정밀한 길이까지 재놓은 것을 보면 당시 프레스트윅이 이 홀을 얼마나 자랑스러워했는지 짐작이 간다. 모리스의 아들 톰 모리스 주니어는 1870년 오픈 1라운드 이 홀에서 3타로 홀아웃, 골프 사상 첫 더블이글(알바트로스)을 기록했다.

75개의 위대한 코스를 설계한 모리스의 첫 작품이 프레스트윅이다. 가장 많은 열정과 상상력으로 설계한 코스가 여기가 아닐까 싶다. 세상과 정치와 돈을 알고, 경험이 쌓이기 시작하면 천재의 날카로움은 사라진다고 나는 생각한다.

프레스트윅 링크스를 만들 때 모리스는 골프나 세상이 명확하지 않은 것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 도그레그와 러프, 둔덕 등으로 타깃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고향에서 쫓겨났고 첫 아들을 병으로 잃은 톰 모리스의 마음도 그랬을 것이다.

코스는 두 차례 재설계됐다. 그래도 모리스의 흔적은 곳곳에 남아 있다. 그의 고향 올드 코스처럼 신비롭고 모호하면서도 아름답고 세련됐다. 모리스 심미안의 정수가 프레스트윅에 남아 있다.

프레스트윅은 오픈의 고향인데 오픈을 개최하지 못한 지 84년이 됐다. “전장이 짧아서 그런 것은 아니냐”고 했더니 사무처장은 “아마추어 챔피언십이 열릴 땐 7000야드가 넘게 만들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1871년 그의 전임자도 그랬다. “오픈 주최권을 지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회원들은 반대했다. 새 트로피 제작비 15파운드 때문이다. 그들은 오픈보다 회원들 간의 클럽 챔피언십을 중요하게 여겼다. 마스터스를 독점하는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장 같은 지위를 당시 말 한 필 값인 15파운드 때문에 버렸다.

이후 프레스트윅 등 3개 클럽이 경비를 분담하면서 대회를 치르다 1920년 개최권이 R&A에 넘어갔다. 1925년 프레스트윅은 오픈 개최 코스에서도 제외됐다. 갤러리가 선두를 달리던 선수를 압박해 우승자가 바뀌는 사건이 생기면서다. 프레스트윅은 철도로 부흥해 생긴 도시인데 철길이 코스 확장을 막았다. 코스의 전장을 늘릴 수 있지만 갤러리가 설 자리는 없다.

현재는 공항과 도로에도 끼여 짓눌리고 있다. 지금 가장 긴 홀은 541야드로 150년전 최장 홀보다 46야드가 짧다. ‘오픈의 고향’에 탈출구는 없어 보인다.

그러나 과거를 존중하는 이에게 이 코스는 앤티크 보석이다. 영국이 타블로이드의 연예 가십에 정신이 팔려 있는 듯 하지만 적어도 골퍼들은 전통을 돈으로 살 수 없다는 걸 안다. 프레스트윅은 로열 작위를 받은 이웃 트룬보다 회원이 되기 어렵다. 영화 ‘남아 있는 나날들’에서 앤서니 홉킨스는 “아름다운 것은 다만 과거라고 했던가”라고 말했던 것 같다. 

도민이 행복한 더 큰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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