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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오늘] 일제의 ‘내선일체’ 선전에 동원된 비운의 여인 이방자

마사코는 1920년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였던 이은(李垠·오른쪽)과 백년가약을 맺고 남편의 성을 따라 이방자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1901년 11월 4일 일본 황족으로 태어난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梨本宮方子). 한때 히로히토 천황의 배우자로도 물망에 올랐던 그녀는 15세이던 1916년 여름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부모도 몰랐던 약혼 소식이 톱기사로 신문에 실린 것이다. “받아들여야만 합니까?” “제발 그렇게 해주게나. 국가를 위한다고 생각하고. 나라를 위해 군인은 몸을 바치는데 그대는 무사집안의 딸이 아닌가?” 모친은 국가를 위해 딸을 희생하라는 황후의 명을 거역할 수 없었다.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은 망국이라는 슬픈 역사를 쓰고 말았다. ‘한일합방’. 그때 일제는 조선은 식민지가 아니라 나라를 합쳐 일본이 되었다고 선전했다. 제국 일본은 자신을 ‘내지’로 이 땅을 ‘반도’로 부르며, 조선이 내지와 ‘동등한’ 일본의 한 부분이 된 것이지 나라를 앗긴 것이 아니라고 강변했다. 그러나 ‘반도’의 실상은 차별받는 식민지였다. 그 모순을 잠재우기 위한 수사가 ‘일선융화(日鮮融和)’와 ‘내선일체(內鮮一體)’였다. 일제는 일본과 조선이 한 몸이라는 허구를 선전하는 수단으로 두 나라 황실의 핏줄을 섞으려 했다. 황족에 대한 배타적 순혈주의를 고수하던 일본은 피의 순수성을 지켜야 했다. 일제는 고식책으로 일본 황족의 예우를 받으면서도 황족과 확연히 구별되는 ‘이(李)왕족’이라는 새로운 신분을 나라를 앗긴 대한제국 황실 직계후손에게 주었다. “피는 수출하지만 수입하지 않는다.” 황족 여성만을 왕족 남성의 혼인대상으로 삼았을 뿐 왕족 여성은 황족 남성의 배우자가 될 수 없었다. “일선융화를 위한 일이라면 희생도 감수하지 않을 수 없다.” 마사코의 아버지의 말마따나 1920년 4월 28일에 거행된 이은과 마사코, 즉 이방자의 결혼은 식민통치의 모순을 가리기 위한 정략의 산물이었다.

“참 슬픈 일이다. 나 자신 원래 일본인이었으므로 황송하고 애석하게 생각한다. 이런 일을 겪으면서 나의 결혼이 얼마나 견디기 어려운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두운 미래가 훤히 내다보이는 듯했다.” 결혼 한 해 전인 1919년 1월 고종 황제의 죽음이 자연사가 아니라는 소식을 접한 이방자는 자신의 삶이 평탄치 않을 것을 예감했다. “일본은 나를 낳아 준 나라고 한국은 내가 묻힐 나라다. 두 조국을 나는 갖고 있다. 바로 이웃에 있으면서도 항시 가시를 사이에 둘러친 듯한 이 두 나라 어느 쪽이 잘하고 잘 못하고 또는 좋고 나쁜가, 그것은 말로 지적할 수 없을뿐더러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자서전의 에필로그처럼, 제국의 황족이면서 식민지로 전락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비였던 이방자는 두 나라 어느 쪽 편도 들 수 없는 경계인으로 고뇌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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