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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세 임금을 굴복시킨 ‘한밤의 날치기’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숙종의 계비 인원왕후 김씨의 명릉.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 내에 있다. 왼쪽으로 숙종과 인현왕후 민씨의 능이 보인다. 인원왕후는 원래 소론가였으나 남편을 따라 노론을 지지했다. 노론은 연잉군을 지지한다는 인원왕후의 수찰을 받아 쿠데타의 안전판으로 삼으려 했다. 사진가 권태균
과정과 결과는 동전의 양면이어서 과정의 정당성이 결여되면 결과의 정당성도 훼손될 수밖에 없다. 노론은 ‘경종 축출과 연잉군(영조)’이라는 당론을 결정했는데 노론의 당력은 그만큼 막강했다. 그러나 왕조국가에서 국왕을 몰아내고 특정 인물을 추대하려는 구상은 심한 반발에 부닥칠 수밖에 없었다. 정권에 눈이 먼 노론은 이를 강행하면서 많은 비극이 발생한다.



독살설의 임금들 경종③ 연잉군 왕세제 옹립



경종 1년(1721) 8월 20일 사간원 정언(正言) 이정소(李廷<71BD>)가 상소를 올린 것이 신호탄이었다. 이정소는 “지금 우리 전하께서 춘추가 왕성하신데도 아직 저사(儲嗣: 왕의 후계자)가 없으시다”면서 경종에게 아들이 없음을 지적했다. 이정소의 상소는 곧바로 핵심을 파고들었다.



“방금 국세는 위태롭고 인심은 흩어져 있으니 마땅히 나라의 대본(大本: 세자)을 생각하고 종사의 지극한 계책을 꾀해야 하는데도 대신들은 아직껏 이를 청하지 않으니 신은 이를 개탄합니다.(『경종실록』 1년 8월 20일)”



아들이 없는 임금에게 건저(建儲: 세자를 세움)를 청하지 않았다고 대신들을 꾸짖는 상소였다. 잘 짜인 한 편의 각본이었다. 정6품 사간원 정언이 발의하면 배후의 대신들이 처리에 나선다는 각본이었다. 아들이 없는 33세의 임금에게 후사를 세우라고 요구하는 것은 자신들이 임금으로 모실 의중의 인물이 있다는 뜻이었다. 태종 때 같으면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할 일이었지만 이때는 달랐다. 이정소 독단으로 올린 상소가 아니었다. 이정소는 ‘경종 축출과 연잉군(영조) 추대’라는 노론 당론을 야당 몰래 기습 발의하는 역할을 맡았을 뿐이었다.



이정소는 “사직의 대책(大策: 세자 결정)을 정하시는 것이 억조(億兆) 신민의 엄숙한 소망(<9852>望)입니다”라고 말했지만 억조 신민이 아니라 노론만의 ‘엄숙한 소망’이란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자신을 무력화시키려는 이 상소에도 경종은 ‘대신들과 의논해서 품처하라’고 심상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노론은 기다렸다는 듯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경종수정실록』의 이 날짜 기록은 인현왕후의 오라비 민진원(閔鎭遠)의 입을 빌려 경종 즉위 직후부터 ‘건저(建儲) 의논이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호조판서 민진원은 ‘즉위한 지 한 해도 지나지 않아 건저 하면 의혹이 생길 것’이라면서 국상이 끝나는 3년 후에 의논하자고 주장했고 영의정 김창집도 동조했다는 것이다.



국상 중에는 부부관계도 자제해야 했기에 3년 후를 기약한 것이었으나 병조판서 이만성(李晩成) 등은 ‘당장 의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3년 후’와 ‘지금 당장’으로 갈라졌던 노론 내부는 이정소의 상소가 나오자 바로 통일되었다. 이날 김창집이 빈청(賓廳: 회의 장소)으로 가면서 민진원에게 “3년 뒤에 하려고 했는데 이미 말이 나왔으니 극력 청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말하자 민진원은 이렇게 답한다.



“이 의논이 이미 나온 후에는 한 시각도 지연할 수 없으니 반드시 오늘 밤에 극력 진달해서 대책(大策)을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지연된다면 종사의 변이 반드시 생길 것입니다(『경종수정실록』 1년 8월 20일).”



경기도 용인시 기흥동 마북동에 있는 유봉휘 청덕애민비. 유봉휘가 용인현감으로 있을 때 선정을 베푼 것을 기념해 숙종 31년(1705) 새긴 것인데 영조 즉위 후 유배갔다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비가 남아 있는 것이 이채롭다.
아들 없는 임금의 후사를 ‘반드시 오늘 밤’에 결정해야 한다는 말은 ‘3년 운운’이 노론의 계획적인 쿠데타라는 비난을 희석시키기 위한 면피용 수사에 불과했음을 말해준다. 훗날 이정소의 집은 서덕수·김창도·김성행 등 경종을 죽이려 한 혐의로 사형당한 노론 대신들의 아들·조카들의 단골 회의 장소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데서도 계획적 쿠데타임을 말해준다. 숙종이 재위 14년 만에 후궁 장씨에게서 난 왕자를 원자로 책봉하려 하자 ‘인현왕후가 왕자를 생산할 가능성이 있다’면서 극력 반대했던 노론이었다. 그때 인현왕후는 스물둘인 반면 이때 경종의 계비 선의왕후 어씨는 열일곱에 불과했다. 노론은 ‘이날 밤 안으로 후사 결정’이란 당론 관철을 위해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일단 궁궐문을 닫지 못하게 유문(留門)시켰다.



『경종실록』의 사관(史官)이 “당일 대신들은 조정에 모여 발의하지 않았고, 또 교외(郊外)에 있는 대신에게는 알리지도 않았다”라고 전하는 대로 소론 대신들은 의도적으로 배제시켰다. 변란이라도 일어난 듯 밤 2경(二更: 오후 9~11시)에 영의정 김창집, 좌의정 이건명, 호조판서 민진원, 병조판서 이만성, 형조판서 이의현 등 노론 대신들이 급히 면담을 요청했다. 소론에 속한 우의정 조태구, 이조판서 최석항 등은 배제되었다. 시민당(時敏堂)에서 경종을 만난 노론 대신들은 빨리 후사를 결정하라고 다그쳤고, 승지 조영복(趙榮福)은 “대신들과 여러 신하들의 말은 모두 종사의 대계(大計)를 위한 것이니, 속히 윤종(允從)하소서”라고 가세했다.



경종은 “윤종한다”고 수락했으나 김창집과 이건명은 ‘자전(慈殿: 대비)의 자지(慈旨: 대비의 지시)가 있어야 봉행할 수 있다’면서 대비 인원왕후의 수필(手筆)을 얻어오라고 요구했다. 정사에 간여할 수 없는 대비까지 끌어들여 사후 안전판으로 삼으려는 것이었다. 『경종실록』은 “임금이 대내(大內: 대비전)로 들어갔는데 오래도록 나오지 않자 김창집 등이 승전 내관을 불러 구계(口啓: 말로 아룀)로 임금을 재촉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의통략』은 “김창집 등이… 마음속에 두려움이 없지 않았다”라고 전하고 있다. 인원왕후 김씨는 소론 김주신(金柱臣)의 딸이었으나 김주신이 국구(國舅: 국왕의 장인)가 된 후 당색을 멀리했으며, 인원왕후도 남편 숙종을 따라 노론을 지지했지만 소론 편을 들지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던 것이다. 경종은 날이 밝아 새벽 누종(漏鍾: 물시계)이 친 후 낙선당(樂善堂)에서 다시 노론 대신들을 만났다. 경종이 책상 위를 가리키며 “봉서(封書)는 여기 있다”고 말하자 김창집이 뜯어보니 대비의 친필 두 장이 있었는데 한 장은 해서(楷書)로 ‘연잉군(延<793D>君)’이라고 쓰여 있었고, 다른 한 장은 한글 교서였다.



“효종대왕의 혈맥과 선대왕의 골육은 다만 주상과 연잉군이 있을 뿐이니 어찌 다른 뜻이 있겠소? 내 뜻은 이와 같음을 대신들에게 하교함이 옳을 것이오.”



『경종실록』은 “여러 신하들이 다 읽어보고 울었다”고 전하고 있다. 한밤의 날치기가 성공한 데 대한 기쁨의 눈물이었다. 만백성과 소론은 전혀 모르는 가운데 하룻밤 사이에 차기 국왕이 연잉군으로 결정된 것이었다. 노론이 축제 분위기에 싸여 있던 8월 23일 소론의 행(行: 관직이 품계보다 낮을 경우 붙는 말) 사직(司直) 유봉휘(劉鳳輝)가 상소를 올려 문제를 제기했다.



“나라에 있어 건저가 얼마나 중대한 일인데 한강 밖에 나가 있는 시임(時任: 현직) 대신들도 전혀 알지 못하고, 처음 불러서 나가지 않은 사람은 다시 부르지도 않고…(『경종실록』 1년 8월 23일).”



먼저 절차상의 잘못을 지적한 유봉휘는 노론이 내세운 논리의 문제를 지적했다.

“우리 전하께서는 중전을 다시 맞이하셨으나 약을 드시며 계속 상중에 계셨으니 후사(後嗣)의 있고 없음을 아직 논할 수도 없습니다. 전하의 보산(寶算: 나이)이 한창 젊으시고 중전께서도 겨우 계년(<7B53>年: 15세)을 넘으셨으니 나중에 종사(<87BD>斯: 아이를 많이 낳는 것)의 경사가 있기만을 바라는 것이 온 나라 신민들의 엄숙한 소망(<9852>望)입니다.”



유봉휘는 ‘병환이 있다면 의약에 정성을 쏟아야 하지만 이를 신경 쓴 사람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고 비난했다. 의약은커녕 병이 있는 임금에게 철야를 시킨 노론이었다. “비록 그 성명(成命)은 이미 내려졌으므로 다시 논의할 수는 없을지라도 대신과 여러 신하들이 (군부를) 우롱하고 협박한 죄는 밝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신 이하의 범죄를 저지른 것을 바로잡음으로써 나라 사람들에게 사과(謝過)해야 합니다(『경종실록』 1년 8월 23일).”



그러자 승지 한중희(韓重熙)가 유봉휘를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김창집 이하 대신들은 늦은 밤까지 청대해 국청을 설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종실록』 사관이 “그(유봉휘)의 뜻은 김창집 무리들이 경종에게 무례했기에 스스로 경종을 위하여 한 번 죽으려고 마음을 먹은 것”이라고 평하면서 유봉휘도 당론에 따른 것이라는 양비론을 펴고 있다. 그러나 왕조국가에서 노론의 행위는 명백한 쿠데타였다. 노론은 일제히 유봉휘의 처벌을 주청했는데 『경종실록』은 그 정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이때 삼사(三司)는 날마다 대궐문 앞에 엎드려 상소하였고, 대신은 여러 재신(宰臣)들을 거느리고 엄한 국청을 열어야 한다고 계청했으며 종실(宗室)과 관학(館學: 성균관) 유생들도 상소했다. 화색(禍色)이 날로 급해졌는데도, 유봉휘는 의금부 앞 거리에 짚자리를 깔고 대명(待命: 명을 기다림)하면서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으니, 도성 사람들이 다 모여서 구경했다고 한다(『경종실록』 1년 8월 25일).”



이때 소론 우의정 조태구(趙泰耉)가 차자를 올려 ‘그 뜻만은 나라를 위하는 붉은 마음(赤<5FF1>)으로 결코 다른 마음이 없었다’면서 유봉휘의 국문을 반대했고, 경종이 “경의 차자를 보니 국청 설치를 명한 것이 잘못임을 알겠다”고 받아들였다. 유봉휘는 사지(死地)에서 겨우 살아났다. 그러나 연잉군의 세제 책봉은 기정사실이 되었고, 노론은 두 달이 채 못 된 경종 1년(1721) 10월 10일 경종을 무력화시킬 두 번째 정치 일정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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