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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 상징'이 '찬밥' 전락 … 명예회복의 길은

‘평균 신장 5㎜, 몸무게 0.2g 안팎, 피부는 반투명의 윤기 있는 흰색….
쌀 한 톨의 간단한 신상명세다. 체구가 워낙 작다 보니 숟가락 하나 채우려 해도 수백 개는 족히 모아야 한다. 가루를 내 빵이나 국수를 만들어 먹기도 어렵다. 원래 습지식물이었기 때문인지, 밥이 되려면 제 체구보다 훨씬 많은 물을 필요로 한다. 간편함이나 신속함과는 거리가 있다.그럼에도 쌀은 수천 년간 밀ㆍ옥수수와 함께 인류를 먹여 살려온 주식이었다. 아시아를 중심으로 세계 인구의 40%가 날마다 쌀을 먹는다. 인류가 섭취하는 칼로리의 21%를 쌀에서 얻는다는 통계도 있다. 좁은 땅에서 많은 수확을 거둘 수 있고 우기와 건기가 뚜렷한 아시아에 특히 잘 맞는 작물이다.

쌀, 명품이 미래다


인류가 야생 벼를 재배하기 시작한 것은 적어도 1만 년 전으로 추정된다. 양쯔강 중류나 인도, 동남아시아 등 다양한 지역이 원산지로 꼽힌다. 한국에서도 짧게 잡아 3000년 전, 길게 잡아 1만5000년 전의 볍씨가 출토된다. 쌀을 떼어놓고는 우리의 삶과 문화를 설명할 수 없는 이유다. 단군이 하늘에서 내려올 때 데려온 세 참모인 우사ㆍ운사ㆍ풍사는 모두 쌀 농사와 관계가 있는 존재들이다.

효녀 심청은 아버지의 눈을 띄우기 위해 공양미 삼백 석을 바쳤다. 농경사회에선 쌀로 만든 밥과 떡과 막걸리가 대표적인 주식ㆍ간식ㆍ술이었다. 쌀뜨물로 국을 끓이고 쌀겨는 거름이나 베갯속의 재료로 썼다. 지푸라기를 섞은 황토로 벽을 세우고 지푸라기를 엮은 이엉을 얹은 게 초가집이다. 이런 사회에선 쌀을 사는 게 부끄러운 일이었다. 쌀을 사러 장에 나가면서도 ‘쌀 팔러 간다’고 말해야 했다. 먹을거리가 풍족해진 1980년대 이전만 해도 많은 한국인은 ‘흰 쌀밥에 고깃국’을 먹는 것을 소원으로 여겼다. 오랫동안 쌀은 식량과 돈과 재산을 함께 아우르는 풍요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세상이 변했다. 쌀은 더 이상 돈으로 쓰이지 않는다. 샐러리맨들이 자기 월급을 ‘쌀 몇 가마’로 바꿔 계산하던 모습은 70년대 이전 풍경이 됐다. 쌀 가마를 높이 쌓은 넉넉한 곳간이 부자를 상징하던 시절도 지났다. 이젠 주식의 자리도 장담하지 못할 상황에 처했다. 1980년 한 사람당 130㎏이던 연간 쌀 소비량은 지난해 75.8㎏으로 급감했다. 하루 평균 207.7g, 채 두 공기가 안 되는 양이다. 사람이 모두 밥심으로 살던 시대는 지나갔다. 젊은 층일수록 빵이나 국수로 일상의 에너지를 얻는 경우가 많아졌다.

쌀의 위기는 문화적ㆍ사회적 갈등을 키웠다. 30년 전 혼·분식을 장려하며 쌀 소비를 줄이기 위해 애를 쓰던 정부는 요즘 이삭 팬 논을 갈아엎는 농민들의 반발에 시달리고 있다. 가뜩이나 밥 한 공기 값이 껌 한 통 값도 안 돼 울분을 삭이던 농민들에게 쌀값이 더 떨어지고 외국 쌀이 밀려들어 오는 세태가 반가울 리 없다. 밥 대신 피자를 찾고, 떡 대신 자장면을 찾는 아이들과 이를 말리는 부모들 사이의 다툼도 가정에서 흔히 벌어지는 일이다. 풍요로움이 쌀엔 힘든 시절이 됐다. 역설이다.

정부라고 손 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김대중ㆍ노무현 정부는 북한에 쌀을 지원해 쌀값 안정과 과다재고를 해결하려 했다. 비축미를 늘리고 농민이 다른 농사를 짓도록 유도하는 정책이 계속되고 있다. 일부 농민은 ‘프리미엄 쌀’로 자구책을 찾고 있다. 워낙 값이 싼 외국쌀과의 경쟁에서 이기지 못할 거라면 고급화로 승부를 내보자는 생각이다. 막걸리가 부활을 노래하고 빵 대신 떡으로 아침식사를 하는 가정도 늘고 있다. 레토르트 밥에 이어 떡볶이ㆍ국수ㆍ빵으로 쌀의 변신을 앞당기려는 시도도 활발하다.

문제는 이 위기가 한때의 일로 그치지 않을 거라는 점이다. 맞벌이 부부가 늘고 식생활이 간편해지면서 되레 가속화될 수밖에 없다. 경제발전이라는 대의와 농민 생계, 국민 정서 사이의 충돌도 계속될 것이다. 그렇다고 알렉산더가 단칼에 베어버린 ‘고르디우스의 매듭’처럼 한 방에 해결할 묘책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다양한 대안을 모색하고, 오랜 시간을 공들여 하나하나 풀어내야 한다. 추수의 계절, 가을에 중앙SUNDAY가 쌀의 고민과 희망을 짚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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