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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절대권력 탄생 도운 ‘유신의 2인자’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OBITUARY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 별세





31일 오후 9시 서울 강동구 상일동 경희대 동서신의학병원 장례식장 22호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복도는 조화 50여 개로 가득했다. 벽은 미처 다 들여놓지 못한 화환에서 떼어 붙인 리본으로 빽빽했다. 김형오 국회의장, 원세훈 국정원장, 자승 조계종 총무원장 등의 이름이 눈에 띄었다. 영욕의 세월 보낸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의 가는 길이 초라하진 않았다. 사돈인 SK최태원 회장과 한화 김승연 회장의 화환도 보였다. 최 회장은 일찌감치 오후 6시에 조문을 다녀갔다.



이 전 부장은 한때 박정희 대통령 유신(維新) 권력의 2인자였다. 중앙정보부장으로 있었던 1970~73년 그는 제7대 대통령 선거를 총지휘했다. 권위주의 정권의 절정인 유신체제 탄생에도 적극 참여했다. DJ(김대중) 납치 사건은 그의 책임하에 진행됐다. 평양에서 김일성 주석을 만나 7·4 남북공동성명을 이끌어낸 건 이 전 부장의 업적이었다.



그의 별명은 제갈조조(諸葛曹操)였다. 제갈공명과 조조를 합친 것 같다는 얘기다. 치밀하고 지략이 뛰어난 전형적인 모사 스타일이란 평을 받았다. 통치자와 주파수를 맞추는 데 비상한 재주를 발휘했다. 70년 주일 대사 시절 그는 도쿄 대사관 근처 일식집에서 생선 초밥을 비행기편으로 박 전 대통령에게 공수할 정도였다.



그에 대한 박 전 대통령의 신임은 두터웠다. 이 전 부장이 친미 정보통이란 점도 발판이 됐다. 63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그는 비서실장을 맡는다.



‘제갈조조’ 이후락은 ‘피스톨 박’ 박종규 당시 경호실장과 끊임없이 부딪혔다. 두 사람은 치열한 충성 경쟁을 벌였다. 박 전 대통령의 용인술이기도 했다. 두 사람의 충돌엔 성격 차이도 작용했다고 한다. 책사형(이 전 부장)과 행동파(박 전 실장)의 대립이었다. 그가 이끌던 청와대 비서실은 ‘소내각’이란 별명을 얻을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69년 10월 박 전 대통령은 3선 개헌의 후폭풍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그를 주일 대사로 보냈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은 일본에 있는 그를 다시 찾았다. 71년 4월에 있을 제7대 대선에 ‘제갈조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번에 그가 간 자리는 중앙정보부장. 그에게 맡겨진 임무는 야당인 신민당 대선 후보 김대중의 바람을 잠재우는 것이었다. 이후락은 정보부장이 되자마자 남산 지휘부를 종합청사로 옮겨 선거공작을 지휘했다.



그가 권력의 정점에 선 때는 72년 남북공동성명을 이끌어낼 무렵이다. 대북 밀사로 평양으로 가 김일성 주석과 사상 첫 남북 비밀회담을 했다. 3박4일간 머물며 두 차례에 걸쳐 김 주석과 회담했다. 당시 이 전 부장이 김 주석으로부터 선물로 받은 ‘금강산 선녀도’가 서울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국가기록원 특별전에 전시되기도 했다.



하지만 윤필용 수도경비사령관이 “박정희의 후계자는 이후락”이라고 말한 ‘윤필용 사건’으로 위기를 맞는다. 윤 사령관은 이 전 부장의 심복이었다. 윤 사령관은 이 전 부장에게 박 전 대통령의 ‘노쇠’를 입에 담았다. 이 사건으로 윤 사령관은 옷을 벗었고, 이에 다급해진 이 전 부장은 김대중 납치 사건을 주도해 박 전 대통령에게 충성심을 보이려 했다는 것이 유력한 분석이다. 98년 미국 국가안보기록보관소는 홈페이지에서 ‘1973년 비밀 외교문서’라는 자료를 통해 이 전 부장이 ‘김대중 납치 사건’을 주도했다고 밝혔다. 이 사건에 대해 그는 끝까지 입을 열지 않고 눈을 감았다.



‘떡고물’이란 말을 유행시킨 이도 이 전 부장이다. 12·12 이후 서울의 봄이라 불렀던 80년 3월 그는 자신이 축재한 재산과 관련해 “떡을 주무르다 보면 떡고물이 묻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정보부장 등으로 정치 자금 조달을 맡다 보니 부스러기 돈이 생겼다는 주장이었다. 80년 6월 신군부는 그를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지목했다. 축재액은 194억원으로 발표됐다.



79년 경남 울산-울주에서 출마해 무소속으로 당선됐지만 10·26사건으로 박 전 대통령이 서거하자 세상과 인연을 끊었다. 경기도 하남에 살며 광주에서 도자기를 구우며 말년을 보냈다. 5~6년 전부턴 도자기 굽기도 그만뒀다. 그런 세월이 30년. 노인성 질환으로 최근에는 지인들을 잘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신용호·구희령 기자 (nova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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