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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산모가 병원비 대신 준 옛 등잔, 3代 보물이 되다

한국등잔박물관 김형구(68) 관장의 아버지 김동휘(91)씨는 수원의 산부인과 개업의였다. 지금이야 임신을 알아채고 30분이면 산부인과를 찾아간다지만, 60년 전 병원이란 시도 때도 없이 가는 곳이 아니었다.

“동네에 아기 잘 받는 아줌마가 하나씩 있어요. 일단 그 아줌마가 받다가 안 되면 산파한테 가는 거야. 산파가 하다 안 되면 오밤중에 병원으로 오는 건데…. 집이랑 병실이 붙어 있었어요. 아버지가 ‘너는 들어가라’고 하시는데, 안 볼 수가 없지.”

산모와 태아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팔이나 다리 하나만 세상 밖으로 내민 태아, 도저히 건드릴 수 없는 피 철철 나는 산모였다. 그런 산모들을 간신히 살려내면 퇴원할 때 “죄송합니다”하고 물러났다. 정해진 입원비도 없었다. 워낙 가난하던 시절이었다.

“어떤 가난한 엄마가 아이 낳고 몇 달 뒤 인사를 왔어요. 병원비 대신 집안에서 대대로 물려온 등잔을 가지고 온 거죠. 그게 아버지에겐 어머니, 그러니까 우리 할머니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답니다.”

1 화촉. 표면에 화려한 빛깔을 들인 밀초로 장식한 초. 초의 재료인 밀랍은 매우 귀해 궁중이나 고관대작 외에 사용할 수 없었다. 서민들은 혼례식 하루만 화촉을 밝히도록 허락받았다.2 백자 쌍심지 등잔. 불 구멍이 두 개인 백자 등잔이다. 석유가 수입된 이후 만들어진 것이다. 심지가 두 개라 상대적으로 기름이 많이 들어 ‘부자 등잔’이라고도 했다. 3 은입사희자문 무쇠촛대. 희(囍)자 광배가 달린 촛대. 무쇠에 음각으로 문양을 새긴 뒤 그 틈에 은실을 상감해 만들었다. 사대부 집안 사랑방에서 사용한 고급 촛대.
아버지가 어릴 적 잠결에 눈을 뜨면 어머니는 등잔불 앞에서 바느질을 하셨단다. 어두운 등잔불에 바싹 다가앉아 한 땀 한 땀 옷을 깁는 어머니의 콧김에 불은 흔들리고, 그 불빛이 어른거리던 얼굴은 더없이 예뻐 보였다. 그때부터 등잔 수집은 시작됐다. 전기가 들어온 뒤의 등잔이란 폐품 취급을 받았던 터라 값도 쌌다.

“할아버지는 서화에 관심이 많으셨고, 아버지는 등잔을, 저는 도자기를 좋아했어요. 서로 배우고 의논해 가며 3대가 대를 이어 골동품을 모았죠.”
1969년 당시 국립박물관장 미술과장이던 고 최순우 선생의 권유로 병원 한구석에 ‘한국고(古)등기전시관’을 열었다. 사립박물관이란 존재 자체도 없던 시절이라 화제가 됐다. 97년 경기도 용인시에 지금의 박물관을 개관했다. 박물관 1층엔 부엌부터 사랑방·안방까지 옛 생활상을 재현했다. 사랑방엔 은입사 무쇠 촛대를, 안방엔 나비 광배가 달린 촛대를 넣어뒀다.

“안방 촛대에 광배가 왜 있느냐. 외풍이 심한 옛날 집에서 바람을 막아줬고, 빛이 반사돼 고루 빛나게도 했죠. 사랑방에서 지아비가 건너오면 방향을 돌려 조명 조절도 하고요.”

2층은 본격적인 등잔 전시실이다. 소재·시대·종류별로 등잔들이 놓여 있다. 대나무의 절개를 숭상한 조선시대 등잔대엔 죽절 무늬 디자인이 많고, 불교가 지배한 고려의 등잔대엔 염주 모양 디자인이 많다. 자로 잰 듯 반듯하기보다 비스듬히 자연스러운 사선을 그리는 작품이 많다. 등잔대의 직선과 등잔받침의 곡선이 어우러지는 미감은 지극히 현대적이기까지 하다.

“페르시아나 유럽은 등잔대가 아니라 등잔 용기 자체가 발달했어요. 의자를 쓰는 곳에선 대를 만들 필요가 없어요. 테이블에 올려 두면 되니까. 앉아서 생활하는 우리는 불의 높이가 앉은 눈높이에 와야 하지요. 그래서 등잔대만큼은 우리나라만 한 데가 없어요.”

횃대와 등잔을 형상화한 박물관의 외관은 수원 화성을 본떴다. 수원에서 나고 자란 아버지는 화성에서 뛰놀며 유년시절을 보냈다. 의사가 된 뒤 취미로 사진을 시작했다. 그가 애정을 담아 찍은 것이 전쟁으로 여기저기 허물어진 화성이었다. 화성 복원에 앞장선 그는 그때 찍은 사진으로 지난 7~8월 수원화성박물관에서 특별사진전을 열었다.
구순이 넘은 나이에 당시 여러 매체의 인터뷰에 왕성히 응하다 탈이 나 응급실로 실려가 한참 고생을 했단다. 이번 인터뷰에 아버지가 아니라 아들만 응하게 된 것도 그런 까닭에서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관장이 된 아들은 박물관 재단 이사장직도 함께 맡고 있다. 이들 부자는 일찌감치 박물관을 재단화했다. “여기 있는 유물들을 무덤에 가지고 갈 수 없잖아요. 어차피 국민 것이란 말이죠. 우리 3대가 모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까지는 했으니 재단법인을 만들어 사회에 환원하는 거지요. 재단이 100년이고 200년이고 운영하다 정 힘들어져 못하게 되면 경기도에 주도록 정관에 정해 놨어요. 한참 후의 일이지만.”

그러니 박물관에 그들 부자의 재산은 없다. 김 관장은 19년 된 엑셀 승용차를 몰고 다닌다. 독일항공 한국 지점장, 미국 WANG 컴퓨터 한국 사장, 미국 루이지애나주 경제고문 등을 지낸 그의 이력과 낡은 국산차는 한참 거리가 멀어 보였다. 대를 물려가며 쓰던 자개장도 전시실 안에 넣어놨다. 등잔 박물관에서 보고 갈 것은 등잔의 아름다움 말고도 더 있었다. 박물관에 담긴 가족의 철학이었다.



중앙일보 10년차 기자다. 그중 5년은 문화부에서 가요·방송·문학 등을 맡아 종횡무진 달렸다. 사람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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