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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거 100년] 100년 전 역사의 현장엔 세모·네모 ‘두 암호’만 …

중국 헤이룽장성 성도(省都) 하얼빈시는 다소 쌀쌀했다. 10월 하순에 막 들어섰을 뿐인데 눈발까지 날린다. 눈과 얼음의 도시 하얼빈, 이곳의 자연은 ‘안중근((1879~1910) 의거’가 벌어진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변함이 없는 듯했다. 하지만 건축물과 거리에선 더 이상 옛 사진의 풍광을 찾아내기 힘들다. 17∼20일 하얼빈을 방문, 100년 전 의거의 현장으로 들어가 보았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쯤 하얼빈역 플랫폼, 그 역사적 시간과 공간에서 안중근은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세 발의 총알을 발사했다. 우리에겐 원흉이지만 일본에선 ‘근대화의 원훈’으로 꼽히기도 하는 이토 히로부미. 두 인물은 한 사람이 뜨면 다른 한 사람은 져야 할 숙명의 관계였다. 안중근은 이토를 왜 쏘았을까. ‘원흉’과 ‘원훈’은 글자로는 한 자 차이지만 그 사이에 놓인 역사 인식의 차이는 극과 극을 달린다. 안중근은 거사 직후 체포돼 순국할 때까지 시종일관 자신의 거사 목적을 이렇게 밝혔다. “나의 목적은 한국의 독립과 동양평화의 유지에 있다.”


<그래픽을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원흉인가 원훈인가, 하얼빈역의 수수께끼=하얼빈역은 100년 세월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함축하고 있다. 의거 당시 하나뿐이던 플랫폼은 6개로 늘었고, 증기 기관차가 지나던 철로에는 시속 200㎞ 고속열차가 달리고 있다. 1898년 러시아가 세운 단층 역사는 59, 79년 잇따라 중건되며 옛 자취를 감췄다.

안중근 의거의 현장엔 두 개의 암호 같은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세모와 네모다. 1번 플랫폼 바닥에 안 의사의 저격 지점과 이토의 피격 지점을 그렇게 표시했다. 저격 지점엔 가로·세로 각각 50㎝ 크기의 정사각형 안에 세모를 그려 놓았다. 세모의 한 꼭짓점이 이토가 섰던 자리를 가리켰다. 이토의 피격 지점엔 정사각형 속에 또 다른 네모를 각도를 틀어 그려 놓았다. 마름모꼴로 보이기도 한다. 100년 전 거사를 상기시키는 유일한 징표인데 마치 수수께끼 같다. 언뜻 보아선 물론이거니와 자세히 본다고 해도 무슨 의미인지 모르긴 마찬가지다. 승객들은 무심코 지나칠 뿐이다. 안내판 하나 없는 바닥의 세모와 네모에 주의를 기울일 여유는 없는 것이다. 두 표지의 거리는 약 5m여서 10걸음 정도면 도달했다.

하얼빈역 플랫폼 바닥에 그려진 수수께끼 같은 그림.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가 이생에서 마지막으로 서 있던 자리다.
‘무명(無名)의 암호’이건만 이를 순례하는 한국인이 적지 않다고 한다. 1번 플랫폼을 지키는 역무원 쑨커(孫科·27)에게 세모 표시가 뭔지 아느냐고 물어보았다. “한국의 민족영웅 안중근을 알고 있다”며 “이 표시를 보기 위해 많은 한국인이 이곳을 찾는다”고 대답했다.

때마침 서울 가양동의 한 태권도장 소속 초등학생 12명이 도복을 입은 채 의거 현장으로 다가왔다. 하얼빈 의거 100년을 기념해 여는 축구대회에서 태권도 시범을 보이기로 했단다. 추상민(가양초 5년)군에게 소감을 묻자 “안중근 의사의 애국심을 실감할 수 있어 좋다”며 “이런 표지라도 만들어놓은 중국 정부에 감사하고 싶다”고 제법 어른스럽게 대답했다.

◆반복되는 암호화 현상=‘무명의 암호’는 하얼빈역의 세모와 네모뿐이 아닌 듯하다. 암호화 현상은 또 다른 안중근 유적에서도 반복됐다. 하얼빈 공원에서다. 안중근 생존 시엔 하얼빈 공원으로 불리다가 지금은 중국 출신 항일 혁명가의 이름을 따 자오린(兆麟) 공원으로 바뀌었다. 안 의사는 뤼순 감옥에서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긴 바 있다. “내가 죽은 뒤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객지에서 죽은 사람을 그의 고향으로 옮겨서 장사를 지냄)해다오.”

이 같은 유지를 살려 하얼빈시는 2006년 하얼빈 공원에 인공연못을 만들고, 그 옆에 안중근 의사의 친필 유묵 중 ‘청초당(靑草塘)’과 ‘연지(硯池)’라는 글씨를 앞뒤에 새긴 비석 하나를 세웠다. 제1회 하얼빈시 한국주간을 제정하면서 핵심적 행사의 하나로 세운 비석이다. 중국 정부의 지원이 없었다면 어려운 작업이었다.

하지만 이곳에도 안내판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하얼빈역의 세모, 네모와 달리 하얼빈 공원 비석엔 안 의사 특유의 ‘단지장인(斷指掌印·왼손 약지가 잘린 손도장)’이 보인다. 역사 지식이 없는 이들에겐 하나의 암호덩어리일 뿐이다. 안중근의 이름을 생소하게 느끼는 세대가 점점 늘어가는 상황이라 아쉬움이 컸다.

하얼빈시위원회 가이루인(盖如垠) 서기를 만났을 때 하얼빈역이나 자오린 공원에 안중근 안내문이 없음을 지적했다. 그는 “상하이에도 이와 유사한 사례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상황을 알아보고 나서 적당한 정책을 펼 수 있을 것”이라고 신중하게 답했다. 다소 안타까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암호를 풀어야 되살아나는 무명 아닌 무명의 영웅 안중근. 그렇게라도 안중근에 대한 기억을 유지시키고 있어 고맙다고 어른스럽게 말했던 한 초등학생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하얼빈 글·사진=배영대 기자



도움말 주신 분들

취재 협조 21세기 한중교류협회(회장 김한규)

도움말 <중국> 박일 중국공산당 하얼빈시위원위 선전부장, 서학동 하얼빈시 인민정부 문화국 부국장, 향토사학자 서명훈씨, 당월화 하얼빈조선민족예술관 관장 <한국> 21세기 한중교류협회 고문 이수성 전 국무총리, 독립운동사연구소 김용달 수석연구위원

참고 자료 <중국> 『안중근의사 하얼빈에서의 열하루』(서명훈 지음, 흑룡강미술출판사, 2005년 8월), 『안중근과 하얼빈』(김우종 주편,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2006년 6월), ‘영원한 기념-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100주년 기념작품’ DVD(하얼빈시 인민정부 외사판공실 펴냄, 2009년 8월) <한국> 윤경로 한성대 교수 논문 ‘안중근 의거와 동양평화론의 현대사적 의의’(독립기념관 주최 2009 학술대회 자료집), 『안중근 평전』(김삼웅 지음, 시대의 창,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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