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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놓침’의 미학

어린 시절, ‘그림자’라는 라디오 드라마가 있었다. 우리나라에 침투해 암약하는 간첩들의 활동과 그 간첩들을 추적하는 대공 수사요원들의 활약을 그린 ‘반공 드라마’였다. 가수 서유석이 부른 ‘그림자’라는 주제가도 유명했었다. 전체 가사를 보면 실연당한 남자의 외로움을 표현한 것 같은데, ‘어둠이 내리는 길목에 서성이며 불 켜진 창들을 바라보면서~’라는 부분 때문에 반공 드라마 주제가로 쓰인 모양이다.



이것 외에 내가 기억하는 라디오 드라마는 ‘김자옥의 사랑의 계절’과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격동 30년’ 정도다. 라디오 있는 집에 저녁마다 사람들이 모여들곤 하던 시절을 경험한 세대는 아니니까. 하지만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더 먼 과거에는 라디오 드라마의 인기가 그야말로 굉장했던 모양이다. 하루 못 들으면 그 스토리가 궁금해 다음 날 주변 사람들에게 묻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였다고 한다.



이유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 시절엔 텔레비전이 없었고, 영화도 덜 대중적이었고, 놀이동산도 게임기도 없었다. 인터넷도 당연히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돈이 없었다. 그 이후엔 TV 연속극을 보기 위해 ‘텔레비전 있는 곳’으로 모여들었던 시절이 있었다. 더 세월이 흘러 집집마다 텔레비전이 보급된 이후에는 같은 이유로 각자의 집으로 달려가곤 했었다. 드라마 ‘모래시계’가 ‘귀가시계’라는 별칭을 얻었던 것은 불과(?) 14년 전이다.



라디오든 TV든, 방송은 언제나 ‘주는 대로 받는 것’이었다. 시청자가 내용에 영향을 미칠 수 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전파가 송출되는 그 순간이 아니면 보고 들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시피 했다. 재방송이 있기는 해도 기껏해야 한 번뿐이었다. 하지만 이젠 ‘모래시계’ 시절만 해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들이 일상이 됐다. 휴대전화로도 TV를 볼 수 있고, 원하는 프로그램을 원하는 시간에 마음껏 찾아볼 수도 있다. ‘미드’나 ‘일드’도 거의 실시간으로 볼 수 있다. 연속극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시청자 게시판’에 댓글 폭탄을 투하해 결말을 바꿀 수 있는 여지도 생겼다. TV가 신형이면 방송을 잠깐 멈출 수도 있고 뒤로 돌려 다시 볼 수도 있다. 적어도 TV 시청에 관해서는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가 있는’ 세상이 된 것이다.



물론 편리하다. 하지만 좋기만 한 것은 아닌 듯하다. 뭐랄까, ‘놓침의 미학’ 혹은 ‘상실의 애틋함’ 같은 것이 없어졌다. 인생이란 원래 뜻대로 되는 일보다 그렇지 않은 일이 더 많은 법이다. 하지만, 뭔가를 원했으나 가지지 못한 경험도 소중한 추억이지 않던가. 오히려 놓쳐버린 그 많은 것들, 나아가 실패의 경험들이 우리에게 더 좋은 자양분이 되지 않던가.



꼭 보고 싶었던 영화를 개봉관에서 놓치고 재개봉관에서도 놓치고, 텔레비전에서 방영해 줄 날만 손꼽아 기다렸는데, 하필 그날이 할아버지 제삿날이라 또 못 보고 마는, 그런 안타까움을 통해서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성숙해지는 것이 아닐까.



오냐오냐 키운 자식이 더 버릇이 없고 참을성도 부족하다고들 한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그리고 아무 때나 얻을 수 있는 것에 점점 익숙해지는 동안, 정말 중요한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그것을 견뎌낼 수 있는 에너지도 조금씩 약해져 가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박재영 ‘청년의사’ 편집주간·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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