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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오늘] 제2차 아편전쟁, 베이징 조약 … 조선은 여전히 깊은 잠

1860년 10월 베이징조약 체결을 주도한 청국 공친왕(1832~98). 그는 이듬해 동치제(同治帝)를 즉위시키면서 권력을 손에 쥐었으며,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고 양무운동에 힘써 ‘동치중흥’을 이끌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영국에 아편을 갖고 가서 사서 피우라고 국민을 유혹한다면 여왕께서도 틀림없이 분노하실 겁니다.” 1839년 빅토리아 여왕에게 아편 밀수를 막아줄 것을 호소한 임칙서(林則徐)의 편지에 영국은 군함의 포성으로 답했다. 아편전쟁(1840~42)은 두 나라의 무역에 대한 너무도 다른 생각 차이가 빚은 산물이었다.



“천조(天朝)가 만국을 다스림에 평등하게 자비를 베푼다.” 청국은 무역을 세계의 통치자로서 천자가 이민족에 대해 일시동인(一視同仁)의 정신으로 베푸는 은전으로 생각했다. 반면 영국은 국제사회의 공동이익과 부강발전을 도모하는 수단이자, 국제법에 의해 보장되어야 할 모든 문명국가의 권리로 보았다. 그때 청국은 졌다. 그 결과 5개 항 개항, 홍콩 할양, 관세자주권 박탈, 치외법권 인정 등 불평등조약인 난징조약을 맺었다. 청국의 쇄국주의는 무너졌다. 그러나 어쩌다 우연히 진 것으로 생각한 청국 위정자들은 영국의 앞선 바를 따라 배우려 하지 않았다.



5개 항 무역으로도 영국의 고픈 배는 채워지지 않았다. 1856년 10월에 일어난 애로호 사건을 구실 삼아 영국은 주경권(駐京權) 확보와 통상권 확대를 목표로 제2차 아편전쟁을 일으켰다. 그러자 가톨릭 선교권을 노린 프랑스가 합세하였으며, 러시아는 영·불 연합군 철수를 중재하겠다는 핑계로 연해주를 요구했다. 1860년 10월 중화제국의 수도 베이징은 군홧발에 처절하게 유린되었다. 자금성은 불타올랐고, 만주로 피신하는 함풍제를 태운 마차는 먼지를 뒤집어썼다. 공친왕(恭親王)은 영·불·러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베이징조약으로 양쯔(揚子)강을 통한 내륙 진출이 허용되었고, 공사관도 들어섰다. 서양세력의 우세를 뼛속 깊이 새긴 청국 지배층은 그들의 앞선 기술과 무기를 배우고자 양무(洋務)운동을 시발하였다.



연해주가 러시아 손에 들어가자 열강은 공로증(恐露症)에 몸을 떨었다. 청국은 울타리를 잃은 뒤 겪게 될 순망치한(脣亡齒寒)의 두려움에, 일본은 조선이 열도를 겨누는 서늘한 칼이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였으며, 영국은 부동항을 확보한 러시아의 극동함대가 태평양으로 뻗어 나올까 우려했다. 베이징조약이 맺어진 1860년 10월 우리를 둘러싼 열강의 각축전은 이미 시작되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위정자들은 깊은 잠에서 깨어날 줄 몰랐다. 위기를 깨닫기에는 미몽이 너무도 깊었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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